[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의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 · 11]

청동그릇 바닥에 새긴 열여섯글자 호우총을 유명하게 만든명문자료

경인일보

발행일 2007-01-08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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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

 
[11]김재원과 광개토대왕 그릇 >2<

왜 신라고분은 파기만 하면 엄청난 보물들이 쏟아져 나올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무덤은 폐쇄형이다. 고분벽화로 유명한 고구려 무덤은 대부분 방으로 구성되어 있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살림집처럼 들락거릴 수 있다. 처녀분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백제 무령왕릉도 벽돌방인데 산의 능선에 입구가 묻혀 있어서 도굴꾼의 마수를 피해갈 수 있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신라무덤들은 목곽과 그 위를 덮고 있는 사람머리크기의 적석과 봉토 때문에 유물을 파내기가 쉽지 않다.

김재원이 호우총을 발굴대상으로 꼽은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크고 훼손이 되지않은 대형고분을 발굴하자는 일부의 주장을 일축하고, 크기가 작고 봉토 일부가 훼손이 되어 있는 고분을 택해야 뒷날 고고학지식이 늘어났을 때에 우리 역사를 되짚기가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는데, 운명의 여신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작은 크기에 별볼일 없어 보이는 고분에서 국보급의 유물이 발굴된 것이다.

호우총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광개토대왕그릇'은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일반인이 보는 관점과는 달리, 전문가들은 고고학자료의 1순위유물을 명문자료로 꼽는다. 기록이란 후대에 왜곡되거나 덧칠될 가능성이 많다. 특히 승자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기록한다.즉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게 기록이다. 그러나 발굴자료는 생생한 증인의 역할을 한다. 특히 명문자료는 역사적 사실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명문자료가 발굴되면, 발굴단은 환호한다. 호우총에서는 명문자료가 발굴되었다. 그것도 단 한사람의 전문가도 없는 최초의 발굴에서였으니 그 환희는 어땠을까.

문제의 명문은 열여섯자의 글자인데, '乙卯年國崗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으로 청동그릇의 밑바닥에 네줄로 글자가 튀어나오게 주물이 되어 있는 물건이다. 가마솥의 뚜껑을 연상시키는 뚜껑이 달린 직경 24㎝의 그릇은 적석의 압력으로 파손된채 발굴되었지만, 명문은 또렷하고 생생했다.

이제부터 그 열여섯글자의 역사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그릇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반출되었다고 본다.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죽고 그를 기념해서 이 그릇을 만들었다고 해석한다. '을묘년'은 415년이다. 412년 대왕이 승하하고 3년뒤인 그 해에 이 그릇을 제작하였다. 물론 주물제품이니 한개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고, 언젠가는 제2의 그릇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이 그릇 아닌 다른 기념품의 형태로 튀어나올 가능성도 농후하다. 즉 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집안에 세워놓은 광개토대왕비처럼 비석이나 문서의 형태로 남겼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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