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골동품 이야기'·12]김재원과 광개토대왕 그릇 <3>

고구려·신라 생활상 고스란히 잃어버린 우리역사 고리 이어

경인일보

발행일 2007-01-16 제0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12] 김재원과 광개토대왕 그릇 <3>

 

'국강상'은 토지를 넓힌 광개토대왕의 시호이자 수식어이다. '국강상'이란 시호는 백제 근초고왕에게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도 같이 썼다. 대왕의 호칭은 '호태왕'이라고 불렀다. 왕도 아니고 대왕도 아닌 클 태(太)자 '태왕'이라니! 고구려인의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 태왕뒤에 붙은 '호우(壺우)'는 제사지낼 때 쓰는 제기그릇의 형태에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이 고분의 별명이 '호우총'이 되었다. 맨 끝에 붙은 '십(十)'자는 열이 아니라 그릇의 끝에 붙인 제작자의 기호로 추측한다.

호우총에서는 그 외에도 칠기가면이 나왔다. 전에는 그 용도를 잘 몰라서 황금눈을 가진 악귀를 쫓는 방상씨가면으로 추정했으나, 최근에 다른 고분에서 출토된 비슷한 유물을 복원해본 결과 화살통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호우총에 묻힌 사람은 누구일까? 기록이 분명하지 않으니 그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왕자중에서 왕이 되지 못한 진골귀족중의 어느 한사람일 것이다. 혹시 복호(卜好)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는 아닐까 추측해본다.

여당(黎堂) 김재원은 함경도 지경의 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국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일찍 해외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의 뮌헨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벨기에에 유학하여 중국 고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카알 헨쩨 교수밑에서 고고학을 연구했다. 오랜 외국생활 때문에 외국어(영어, 독일어)가 유창해서 국내파 학자들의 통역관같은 역할을 즐겨 맡았다. 우리 학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후진의 양성이 최우선이라는 소신 때문에, 일찍부터 많은 젊은 학자들을 해외에 파견하여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휘하에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줄을 이었다.

여당은 깨끗한 전문가의 표본이었다. 그의 집에는 돈될만한 물건들이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박물관장만 25년을 했으니 웬만 하면 집에 도자기나 서화 혹은 발굴품이 있으려니 생각되지만, 그는 단 한점도 용납하지 않았다. 청빈의 귀감이다. 또 발굴은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호우총으로 발굴대상을 결정한 것도 그의 이러한 소신과 함경도고집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주변에서는 경주지역에서 제일 큰 고분인 속칭 봉황대를 파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그는 훗날 지식이 크게 발전할 때를 대비해 남겨놓아야 한다고 주장해서 관철시켰다.
호우총의 발굴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후대의 발굴에 많은 교훈을 준 발굴이었고, 신라고분은 파기만 하면 국보가 쏟아진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크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경주일원을 비롯하여 달성, 영천, 동래, 창령등 옛신라의 영토내에서는 어디를 파보아도 신라유물이 풍족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런 신라고분에는 경주중심지에 보이는 왕릉으로부터 왕족 혹은 진골귀족이나 지방토호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구성원의 무덤들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호우총에서는 금동관과 함께 금제관장식, 은제허리띠장식, 세환귀고리 등 진골귀족이 착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들과 광개토대왕이름이 들어간 청동제호우와 귀면이 장식된 화살통 무쇠솥 등 다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당시 신라귀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김재원 관장은 이 광개토대왕그릇 1점의 발굴성과를 올린 사실 하나만 갖고도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의 한부분을 채우는 엄청난 공을 세웠다. 

경인일보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