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의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13] 안평대군, 꿈에 본 이상향 '도원' 안견, 사흘새 '불후의 명작' 남겨

경인일보

발행일 2007-02-06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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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1<

10년전인 1996년 겨울 일본 천리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역사적인 한국나들이가 이루어졌다.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호암미술관이 기획한 '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조선전기국보전'의 출품에 맞추어서인데, 참으로 가슴 벅찬 감격스러운 해후가 아닐 수 없었다.

몽유도원도는 시쳇말로 유명세를 크게 타는 그림이다. 당시로서는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일본에서 현해탄을 건너왔다는 사실 자체가 큰 뉴스거리였다. 그즈음 한일관계에 긴장상태가 점차로 고조되고 있던 때라, 천리대학측은 혹시라도 무슨 돌발사고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여 몇 번이나 출품이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을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1939년에 이미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던 몽유도원도는 조선 최고의 명필로 알려진 안평대군이 꾼 꿈을 소재로, 15세기 전반 세종대왕시절에 주로 활동했던 당대의 천재화가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 1418?-1453?)이 단 3일만에 속필로 그려낸 불후의 명작이다.

우리나라의 보물 문화재중에서 몇 손가락안에 꼽아야 할 몽유도원도는 불행하게도 지금 일본이 소유하고 있다. 이 명품은 일반에게 천리교라는 종교로 더 잘 알려진 천리대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비록 우리의 것이지만 일본 소유라서 보고 싶다고 해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세계 인쇄문화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직지심경(直指心經)이 파리국립도서관 소장으로 되어 있어, 우리의 접근이 차단되어 있는 것과 비슷한 처지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언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종교재단인 천리대학의 소유가 되었는지 중간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차례에 걸친 왜구의 노략질이나, 일제 36년 동안의 침탈 혹은 한국문화재를 노리는 일본수집가들의 광적인 집착 등 여러 경로를 상정할 수는 있겠지만, 속시원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1893년 11월 일본 가고시마에서 발행한 감사증에 이미 이 그림의 개인 소유를 인정한 기록이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34년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 개인 소장으로 소개되어 있고, 1939년 소노다쥰(園田淳)을 소장자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천리대학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은 6·25전쟁이 한참때인 195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 명품이 고국으로 영구 귀환할 기회는 두 번 정도 있었다. 한번은 1949년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장사를 했던 골동상 장석구가 몽유도원도를 들고 부산에 나타났다. 어찌된 연유인지는 모르나 그를 통해 국내 골동시장에 매물로 흘러 들어오기는 했는데, 당시 보통 문화재 값의 10배이상이나 되는 300만원 이상의 가격을 고집하는 바람에 국내에 남지 못했다. 대수집가 장택상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보기는 했지만, 워낙 부르는 값이 높아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두 번째는 80년대에 천리교측에서 한국내에서의 포교를 인정해 달라는 전제하에서 양도를 제의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지금도 일본 불교는 공식적인 포교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여하튼 억만금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국보중의 국보인 몽유도원도가 친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호기를 놓친 것은 두고두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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