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골동품 이야기'·14]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2<

경인일보

발행일 2007-02-20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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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2<


우리나라의 그림은 중국 그림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성장했다. 고려시대에는 북송이나 원나라 회화의 영향을 상당히 수용했고, 조선시대에는 명, 청 화단과의 접촉이 활발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 등을 통해서 우리 그림을 일본 화단에 전수해 주기도 했다. 문화나 예술이란 이렇게 상호 교통하면서 화풍이나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성격을 만들어간다.

몽유도원도가 만들어지던 조선 초기의 화단에는 북송 산수화의 대가인 이성(李成)과 곽희(郭熙)가 주도한 이곽파(李郭派) 화풍이 대유행하던 시기였다. 안견이나 여타 화가들은 당대의 원이나 명나라의 화풍보다, 고전미가 넘치는 북송의 광대한 스케일의 고원산수(高遠山水)에 매료되어 교과서적으로 흉내내거나 그려내었다. 몽유도원이라는 소재는 흔한 이야깃거리 중의 하나였지만, 안견은 그의 강력한 후견인이던 안평대군의 주문에 따라 꿈속에 등장하는 경관이나 전개되는 스토리를 '이곽화풍'으로 고상하게 그려 나갔다.

안견은 미스터리에 빠진 화가중의 하나다.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이 1447년 음력 4월 20일 꿈속에서 도원을 여행한 후, 그 내용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였다는 기록을 기준으로 그의 활동을 짚어볼 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이 무렵에는 안견 외에도 선비화가 인재 강희안이나 노비 출신의 천재화가 이상좌 등 거장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후견인이자, 당대 문화계의 거두 안평대군이 1447년 여름 음력 4월 20일에 꾼 도원경 여행 꿈을 토대로, 그 자세한 스토리를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풀어나가도록 한 것이다. 안견은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머릿속에 그리며, 꿈에서 벌어진 광경을 단 3일만에 완성하였다. 그림 자체는 옛그림들이 보통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편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과는 달리, 왼편 아래쪽에서 시작하여 오른편 상단부로 옮아가며 대각선으로 펼쳐나가는 특이한 구성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꿈이야기라는 특수 소재와 화면 전체의 구도를 잡는데 있어 천재화가 안견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얽힌 이야기나 그림의 전개 방식이 특이한데 비하면, 그림 자체의 크기는 뜻밖에 그다지 크지 않다. 고운 결의 비단 바탕에 맑은 채색을 써서 담담하게 그려 나간 이 작품은, 크기에 비해 분위기는 매우 장엄하고 웅대하다. 고산준령이나 기괴한 바위 표현과 그 사이에 숨어있듯이 그려진 꽃피는 도원경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어, 단순히 꿈이야기를 옮긴 것 이상의 가슴 벅찬 감동을 심어주고 있다.

옛그림은 보통 사랑방에 모여 앉아, 말려 있던 족자를 펼쳐가면서 감상하기 때문에 요즘의 그림 감상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러한 방식은 화가들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는 제작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몽유도원도 두루마리에는 본그림 외에 안평대군의 발문과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등 당대의 학자와 문사, 고승 1명 등 20여명과 자필로 써놓은 자작시를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찬문이 함께 곁들여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몽유도원도는 단순히 주문화로서뿐 아니라, 당대의 학식을 대표하는 기라성같은 학자 문인들의 글이 들어가 있어서 시(문장-문학), 서(글씨-서예), 화(그림-회화)의 세가지 성격이 합쳐진 압축된 종합예술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점의 상상속 산수화첩에 그치지 않고, 조선 초기의 문화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화려한 금자탑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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