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골동품 이야기'·15]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3<

실용적 문화에 눈뜬 조선초기 화려한 역사의 한페이지 장식

경인일보

발행일 2007-02-27 제0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15]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3<

몽유도원도와 이를 찬양하는 시문첩은 현재 두개의 횡축으로 표구되어 있는데, 안평대군의 활달예리한 행서풍의 표제로부터 박연의 시문까지가 첫 번째 두루마리에 들어있고, 무인 김종서의 찬시로부터 최수의 시문까지는 두 번째 첩에 들어있다. 표제글은 안평대군이 그림을 받고나서 3년뒤가 되는 1450년 정월에 쓰고 칠언절구를 덧붙였다.

위대한 작품은 훌륭한 후견인과 함께 나타나는 법. 전무후무한 걸작을 남게 한 안평대군의 집에는 그가 즐겨 수집한 중국 대가의 작품들이 무수히 있어서, 안견은 그를 통해서 그림 보는 안목을 키우고 임모하는 가운데 그림 실력을 크게 늘렸다. 훗날 안평대군은 유명한 왕자의 난(계유정난·1453년)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는데, 안견은 기지를 발휘하여 그 난을 피해 살아 남는다.

세종대왕 치세시는 조선 전기 문화의 황금시대였다.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유교를 정신적인 지주로 하여 실용적인 문화에 눈뜨고 있었다. 지금은 유물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조선 초기 문화의 실상을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안견을 비롯한 화가들의 화풍을 보면 당시 새로 꽃피운 문화의 자존심과 기백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은 특히 도자기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조선 초기는 백자의 최전성기였다. 왕은 기품어린 흰색의 순백자 기물들을 사용했고 왕세자는 청화백자를 사용하도록 엄격히 구분되어 사용이 제한되어 있었다. 백자의 기형은 조선초의 상승 분위기를 타서 매우 당당하고 세련되었으며, 청화로 그린 초기 백자의 문양은 중국풍과는 다른 조선 독자적인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안견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 소위 안견풍의 산수화를 완성해 나가게 되는데, 그 대표작이 몽유도원도인 것이다. 우리는 몽유도원도를 통해서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물론 화단과 패트론의 관계, 혹은 중국 그림의 우리 나름의 소화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경인일보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