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316>

경인일보

발행일 2007-03-28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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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

승마하기 좋은 날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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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흰 간호복을 입고 있었는데, 유난히 치마 길이가 짧아 보인다. 그만큼 다리가 늘씬하게 길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삐쭉하게 키만 큰 여자가 아니다. 허벅지 쪽으로 올라갈수록 통통해지는 요염함이라든가, 풍만한 가슴이라든가, 개미처럼 잘록한 허리라든가, 한마디로 갖춰야할 사이즈를 골고루 구비한 전형적인 어인이다.

하나 그녀는 조봉삼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조봉삼이 병실 앞을 지키며, 드나드는 그녀를 눈알이 시도록 쳐다봐도, 눈웃음치며 배냇병신처럼 입을 찢어보여도, '안녕하쇼, 정말 좋은 날씹니다.' 프랑스어도, 영어도, 베트남어도 아닌, 순수한 한국말로 치근덕거리며 바짝 붙어도, 그녀가 보이는 반응은 고작 "메르씨"라는 간결한 인사말 한 가지 뿐이다. 도통 관심이 없다.

특히 박준호와 나란히 병실을 들어설 때나 병실을 나갈 때는 더 그러하다.

박준호와는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재잘재잘 혀 꼬부라진 소리를 마구 쏟아내면서도 막상 조봉삼의 대시에는 얼굴 한 번 돌아봐 주는 법 없이 '메르씨' 하고 찬 바람 쌩쌩 날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지곤 한다.

'씹헐…… 병실 문이나 지키는 경호원 신세라코 사람 무시허고 괄시허는 기가? 확, 쎄리 박을 끼다. 그마! 내 맛 진짜 봤다쿠모 니는 까무라치는기라. 뒤로 벌렁 넘어지는기라. 하모, 유순자가 남편 눈 피해가며 와, 나한테 목을 매것노? 그년도 내 맛 봤다쿠모 까무라쳐서 뒤로 벌렁벌렁 넘어 안 가나! 아니, 엘리시온 안 있나? 그 가수나는 아예 벌리 보지도 못했다카이. 와 그랬겠노? 억지로 쌔리 넣으모 넣었겠지만, 그 길로 병원으로 내달리야 허능기라. 하모, 니는 내 진가를 모린다. 절대로 알 턱이 옶는기야. 내 맛을 실제로 봐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누가 그랬는가. 일이 기묘하게 만들어지려면 뭔가 계기가 있게 마련이다. 조봉삼이 그토록 니 맛 내 맛 입버릇처럼 되뇌던 그 외설스런 열망이 그런 식으로 쉽게 성사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조봉삼이 고수길을 붙들고 신세 한탄을 겸한 욕구 불만에 한창 열을 냈던 바로 그 시간, 문제의 여자가 등장한 것이다.

조봉삼은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라 1층 계단 밑에 있었고, 여자는 2층 계단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찰나다.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라'.

누가 말했는가.

'햐, 그거 삼삼허다'라고 조봉삼이 넋을 잃고 계단 위를 올려다보는데, 중학생 또래의 사내 두어 명이 히히덕거리며 냅다 달리다가 느닷없이 계단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쫓고 쫓기는 게임에 몰두한 탓인지 아이놈들은 눈앞의 장애물에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녀가 그곳에 있었으므로, 흡사 럭비 선수 어깨치기하듯 치고 내려오는 아이 놈에게 치일 수밖에 없다. 일순 하이힐이 벗겨져 허공에 뜨고, 왼쪽 다리가 휘청 꺾이고,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마치 다이빙을 시도한 미끈한 여자 선수처럼 전신이 계단 아래로 사정없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계단에 몸을 구르는 것이 아니다. 디즈니랜드 애니메이션 영화 한 장면처럼 발은 계속 계단을 밟아 뛰고 있는데 몸이 먼저 쏟아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계단 두 계단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섯 계단 여섯 계단을, 마치 비상하려다 마는 새처럼 통통,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더 빠르다. 가속력이 붙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를 그대로 방치 한다면 1층 계단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으깨어져 퍼질 참이다. 상처가 나도 크게 날 판이다.

"어머낫!"

"어, 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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