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325>

경인일보

발행일 2007-04-10 제0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

승마하기 좋은 날 ⑪

325337_38063_5549
"…방치한 게 아니고, …병원에서 환자를 받지 않았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 보라는 바람에…병원만 두 곳을 들르다 보니…."

"어쨌든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동맥이 막혔습니다. 곧 수술을 하겠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아니,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황당해진 박준호가 묻자 "한 시간만 일찍 데려 왔어도…한마디로 이 환자는 시기를 놓쳤습니다."

당연한 결과라는듯이 너무도 냉정하게 또박또박 대답한다.

"그래서 죽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만에 하나 죽지 않는다 해도 정상인으로 살기는 어려울 듯 싶군요. 벌써 마비가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눈알도 휘휘 풀렸고 팔 다리도 제 맘대로 놀고 있다. 흐느적 흐느적이다.

"깨어나게 해 주십쇼. 제발!"

윤성식이 두 손을 모아 쥐고 젊은 의사에게 호소하고 있다. 의사들은 들은 척 만 척이다. 아니, 너무 급한 나머지 윤성식에게 일일이 응대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서승돈이 수술실로 옮겨지고 문이 닫힌다. 이제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릴 수밖에.

"어떻게 하죠? 서 사장님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죠?"

윤성식이 말한다.

"그래요. 그렇게 해야죠."

박준호가 건성으로 대답한다.

"사모님이 미국에 있다는 얘기만 듣고…혹시 박 선생님이 연락처를 아시는지…."

"몰라요."

박준호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한다.

"그 어른에 대해서 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소."

자신이 생각해도 어색할 정도로 박준호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미국에 있는 부인이 그렇게 버티다가 이번에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거 아뇨'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박준호는 잠자코 삼켜 버린다.

따지고 보면 서승돈이 은행 지급 보증서 한 장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면서도, 그토록 기분 좋아했던 것도 부인과 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던가.

이제 비로소 그는 비 오는 날에도 선글라스를 끼는 따위 어설픈 변장술을 부리지 않고서도 홍주리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당당히 획득한 것이었다.

박준호는 생각한다.

'그래, 적어도 어제 오후까지는 아니, 오늘 새벽까지는 서승돈이 홍주리를 완벽하게 소유했던 거였어. 그래, 진정한 사랑은 인생의 모든 것. 이를테면 그 동안 쌓아올린 지위도, 재산도, 심지어 이름까지도 미련없이 내던진 뒤에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박준호는 다시 생각한다.

'이게 누구 이야기인가.'

서승돈이 아니라 바로 박준호, 그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맞아. 박준호에게도 홍주리는 절대적인 존재 아니던가. 어쩌면 서승돈의 그것보다 더 절실한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라. 어느 한순간 그녀 이름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박준호인들 주어진 것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거저 얻으려 한 적이 있는가. 그 자신 역시 최소한 변호사라는 직업이 보장된 옥스퍼드 법대 입학도, 전형적인 영국 처녀 마거릿도, 하다못해 부담 없는 이모처럼 오로지 헌신과 봉사로 일관되게 접근했던 톰 라더 부인까지 깡그리 내던지지 않았던가.

"윤성식씨."

박준호가 입을 연다.

경인일보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