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331>

경인일보

발행일 2007-04-18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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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

승마하기 좋은 날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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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쇼!"

무하마드가 손을 번쩍 들어올려 반긴다. 그러나 그녀는 무하마드의 인사를 미처 받지 못한다. 그녀의 시선이 박준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탓이다. 아르므아르가 말한다.

"운명하셨는데요."

솔직히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했다. 하나, "그 수술 환자 분이 사망했다니까요."

그녀가 또 한번 반복했을 때, 그 주인공이 서승돈이라는 사실을 박준호는 금세 감지한다.

그랬구나. 서승돈이 죽었구나. 집도한 의사들이 예견했던 그대로 기어이 혼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구나.

서승돈이 누군가. 아버지 박상구의 공군사관학교 십수 년 후배였으며, 아버지의 반골 기질에 매료되어 전도가 창창한 전투기 조종사에서 쫓겨나지 않았던가.

그래, 서승돈이 아니었으면 양아버지 대니 라일러가 아버지를 죽인 공범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아니, 서승돈이 아니었으면 그처럼 용감하게 대니 라일러 그늘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서승돈이 아니었으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규명때문에 타계한 작은 아버지 박상길 원혼을 그처럼 통쾌하게 풀어줄 수 있었을까.

서승돈이 아니었다면…….

박준호는 고개를 흔든다. 그래, 그는 갔어. 기어코 가 버린거야. 통킹 만 가스 개발 프로젝트를 계기 삼아, 화려한 재기를 꿈꾸던 서승돈이 저처럼 허무하게 이승을 등지고 말았구나.

무하마드와 방금 나눈 기쁜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감격하고 기뻐해야 할 사람이, 그 소식조차 접해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구나.

박준호도 눈을 감는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위빠사나.'

'위빠사나.'

박준호는 오전 10시에 사우나를 한다. 평소 같으면 새벽 샤워를 했으므로, 설사 땀 흘리는 운동을 했더라도 간단한 샤워로 끝내든가, 아니면 타월로 대충 해결하곤 했었다.

한데 오늘은 다르다. 굳이 프랑스 산 향내 나는 비누와 샴푸를 찾아들고 사우나장 문을 힘차게 연다.

머리를 두 번 세 번 감고,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씻는다. 콧수염도 자르고, 면도도 다시 한다. 손톱도 깎는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여행용 가방 깊숙이 보관해 놓았던 패물함을 꺼낸다. 흡사 한 마리 아름답고 날렵한 새처럼 지리산 야생 녹차농장 위를 유유히 날아다닐지도 모르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박준호에게 하사했던 패물함이다. 호령 박씨 문중의 비밀 병기인 용패가 잠자고 있는 패물함. 할아버지의 준엄한 명령에 의해 박준호의 음낭에 깊이 박혀있는 용패가 다시 패물함으로 원위치한 것이 12년 전이든가.

보디발 장군 부인의 적극적인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감옥행을 선택한 요셉처럼 박준호도 세상의 수많은 여자들로부터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과감히 용패를 벗어 패물함 깊이 묻어버린 것이다.

물론 요셉의 그것은 전지전능한 신과의 약속 때문이었지만 박준호의 그것은 한 여자가 빌미가 된 자기와의 피나는 싸움이다. 그것도 계약이나, 언약에 의한 행동이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해 버린 일종의 자기 극기다.

상대 여자가 그 사실을 알건 모르건 일단 그 여자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갈망한다는 표현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지금껏 박준호는 그 사실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렇다. 사랑하므로 미래를 같이 하겠다고 약속한 남자를 위해 여자만 정조를 지키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할 수만 있다면 남자도 여자를 위해 얼마든지 순결을 고집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신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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