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332>

경인일보

발행일 2007-04-19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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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


승마하기 좋은 날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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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게 이미 배우자가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그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가 무엇이냐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오로지 나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수반되는 행위, 바로 그것이 정체성 찾기이며 스카이 홍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날 용패를 벗으며 할아버지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던가. 할아버지 대를 잇는 호령 박씨 후손의 번영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더 열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처럼 단순하게 표현했던 터다. 어찌합니까. 불충하다 해도, 어리석다 해도 그 길밖에 선택할 수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 길이 아니면 한 발짝도 더 떼어놓고 싶지 않는 걸 어찌합니까.

그 날 달이 밝았던가. 달무리 번짐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싱그러운 지리산의 밤. 교교한 달빛을 털어내듯 바람 한 줌에도 오도방정을 떨어대는 대밭의 수선스러움. 그런 번짐과 떨림과 수선스러움 속에서 박준호는 용패를 벗어 패물함에 쑤셔박듯 집어넣었던 것이다.

한때 톰라더 부인과 시루코 여사에게 1백프로 위력과 위용을 발휘했던 호령 박씨 문중의 비밀병기, 물론 병기를 원위치했다고 해서 위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용패를 착용했으므로 더 맹위를 떨치리라는 믿음 탓인지, 박준호는 괴물처럼 상대를 맘껏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죽 했으면 용패와 같은 옥 재질로 만들어진 용 목걸이를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을 했겠는가. 시루코도 그러하지만 톰 라더 부인, 아니 패티는 또 어땠는가. 시루코 여사의 남편인 오카모토가 보낸 괴한들에게 박준호의 심벌이 잘릴 뻔 했던 그 칠흑 같은 밤, 그녀가 얼마나 질겁하며 호들갑을 떨었는가. 조금 과장한다면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처럼 펄쩍펄쩍 뛰어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용패의 비방이라고 박준호는 믿었었고, 그래서 위험한 병기를, 흡사 핵 보유 포기를 선언하듯 과감히 거둬들였던 터다.

한데, 이제 다시 장미꽃 피는 시절이 대두하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병기를 집어든 것이다. 박준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용패를 음낭에 착용한다. 물론 착용하기 전부터 바람 잔뜩 먹은 풍선인 양 그 위용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 박준호 본인이 내려다 봐도 괴물은 괴물이다.

12년간 한 차례도 실전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스코틀랜드 벤네비스 통나무 집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나서 정말 단 한 번도 써먹지 못한 병기라면, 아니 지리산 분이 누나가 그토록 노골적인 공략을 유도했지만, 베트남 호야가 유혹의 눈길을 그처럼 은밀히 보냈지만 끝내 순결을 잃지 않았다고 하면 세상 사람 누가 믿어줄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고개 잘잘 흔드는 판에 스카이 홍인들, 어머, 어찌 그런 일이…… 눈물 글썽이며 볼이라도 쓰다듬어 줄까.

박준호는 오랜만에 넥타이를 맨다. 물론 검은색 슈트에 검정색 넥타이다. 그는 검정색 포켓치프도 가슴에 꽂는다. 모자도 쓴다. 검정색 모자다. 그 밑에 검은색 선글라스도 낀다. 영락없는 영화 '대부'의 알파치노가 장례식장에서 보여 주었던 세련된 풍모 그대로다.

박준호는 검정색 신형 벤츠도 렌트한다. 운전 또한 처음엔 고수길에게 맡길까 하다가 탄차우로 바꾼다.

홍주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장본인 윤성식도 차에 태우지 않는다. 고수길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 병원에 기다리게 하고 혼자 너르디너른 벤츠에 올라앉는다.

"공항까지 얼마나 걸리지?"

박준호가 손목시계를 들어 보이며 묻는다.

"막히는 때가 아니니까, 반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박준호의 주문에 의해 넥타이 차림을 한 탄차우가 대답한다.

"시간은 충분하구만. 가다가 꽃가게에 좀 들르자구."

"알겠습니다."

"오늘 날씨 기막히게 좋구만."

박준호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한마디 더 한다.

"승마하기 진짜 좋은 날이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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