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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76] 인터뷰 / 최신부와 함께활동한 서재송씨

   

서재송·인현애씨 부부.


   "아픈 환자든 국적을 알 수 없는 혼혈아든 신부님은 섬주민 모두를 사랑으로 포용한 그야말로 살아있는 희생자였습니다."

   최분도 신부가 인천에 머물던 40여년의 세월동안 바로 옆에서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서재송(79·세례명 비오)씨는 "하천공사, 전기공급 등 섬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에 신부님이 직접 뛰어들었다"며 "허름한 작업복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연방 굵은 땀방울을 쏟아냈지만 안면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했다"고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김 양식을 벌일 때에는 찬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솔선수범했기 때문에 어느 일터에서건 섬주민 모두가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고향 덕적도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서씨는 최 신부가 연평도 주임 신부로 활동하던 지난 1962년 첫 만남을 가졌고 백발이 된 지금까지도 고인의 생전 의지를 담아 고아와 혼혈아를 돌보고 있다.

   서씨는 40년간 미국 입양만 2천여명을 보냈고, 부인 인현애(77·크리스티나)씨와 함께 입양아 친부모를 찾아주는 등 사후관리에 나섰다.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양로원에서 만난 신부님은 '비오'를 연방 부르며 아이들을 함께 돌본 그때가 너무 그리웠다"며 소외된 영혼들에게서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인천을 떠나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국내 현황을 자주 물어왔다"고 말한 서씨는 "신부님은 언제나 인천으로, 특히 서해 낙도(落島)로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너무 아쉽다"며 눈물을 훔쳤다.

   서씨 부부는 최 신부가 선종한 지 나흘이 지난 2001년 3월 29일 그 소식을 들었고, 곧장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생을 함께한 정신적 지주이자 동료였던 최 신부의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노부부는 장장 17시간을 달려갔다.

   그리고 서씨는 장례미사에서 추도사를 했다. 최 신부가 숨을 거두자 메리놀 신학대학 총장은 서씨부터 찾았단다. 최 신부가 눈을 감기 전 그를 애타게도 찾았던 것이다. 대학측은 서씨가 오기를 기다려 장례시간을 반나절 이상이나 늦췄다고 한다.

<강승훈기자·shkan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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