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하루는 친구 놈이 하숙방으로 책을 세 권 들고 왔더라구. 평소에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던 놈이라 좀 이상했지. 보니까 니체 전집이야. 반값에 그 책을 사래. 돈이 없다고 했더니 생기면 달라고 하고는 던지다시피 책을 두고 가는거야. 자기는 다 읽어서 필요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저런 바람둥이도 읽는 니체를 안 읽은게 부끄러웠지. 그래서 니체를 읽게 되었고 전공을 법학에서 철학으로 바꾸었어."
"친구가 형 앞길을 망쳤군요."
김상우가 히죽대며 대꾸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알고보니 그 놈이 니체 전집을 읽었다고 한건 순전히 공갈이었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데요?"
"어느 날, 저녁에 술에 취해 비틀대며 걷는데 길가 헌책방 진열대에 그 책이 놓여있더래. 그게 글쎄 나체전집으로 보였다는 거야. 얼씨구나 하고 주머니를 죄다 털어 책을 사서 소중히 싸안고 집에 왔는데 다음 날 아침 술이 깨서 보니 나체전집이 아니고 니체전집이더라는 거야."
"그걸 선배한테 판거군요."
"혼자서 몰래 보려던 책이 나체가 아니라 니체였으니 얼마나 실망이었겠어. 돈이 아까워서 읽으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가 안가더래. 책을 팔려고 자기는 다 읽었다고 사기를 친 거지."
"니체가 여러 사람 실망시켰네요."
우리는 킬킬대며 웃었다.
"운명은 그렇게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발목을 잡기도하지."
"선배에게 니체를 팔다니 대단하네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수업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놈이 나보다 한 수 위더라고. 친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 책을 살줄 알았던걸 보면 말이야."
"손금 보듯 선배를 훤하게 읽고 있었군요."
"내가 치기 만발한 허영쟁이란걸 알아 본거지."
"친했어요?"
"니체를 다 읽은 후에 친해졌지. 그 놈이 바로 니체와 닮았더라고."
선배는 얼굴은 다른 쪽으로 향하고 검지 손가락을 들어 전병헌을 가리켰다. 김상우와 미서는 손바닥으로 술상을 두드리며 웃어댔다. 나는 무슨 뜻 인줄 몰라 멀뚱히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나체전집. 그 주인공?"
이형수가 전병헌을 바라보며 비죽비죽 터지는 웃음을 깨물었다. 선배가 법대에서 인문대 철학과로 전과를 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그 해 봄, 미서와 함께 문학동아리에 가입했을 때 선배는 까마득한 복학생 선배였었다. 그렇기는 해도 오랜 세월 알아왔으니까 선배에 대해 모르는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나는 선배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일까. 남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안다고 하는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웃음이 거두어졌다. 미서와 김상우와 이형수, 그리고 전병헌까지 통쾌하게 웃고 있는데 나는 유쾌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웃을 수 없어 나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단숨에 마셔버리고 빈 잔을 내려놓자 전병헌이 술병을 집어 들었다. 내 잔에 천천히 소주를 채워주는 전병헌을 바라보았다. 선배의 오랜 친구라는 사실 하나로 그가 갑자기 친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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