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다. 빗줄기는 조금 약해져 있었다. 안방으로 가 남편 곁에 나란히 누울 용기는 차마 없었다. 얇은 담요를 들고 건넌방으로 갔다. 한쪽 자락을 깔고 나머지 한 자락으로 몸을 덮고 누웠다. 몸이 지구 중심을 향해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간밤에 내게 일어난 일들이 한 바탕 꿈속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비로소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것 같았다.
꿈속에서 가파르게 경사진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나는 겁에 질린채 그 길로 들어섰다. 가지 않으려고 두 발로 버텼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은 내리막을 향해 구르다시피 내려갔다. 발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길을 갔다. '꿈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꿈을 꾸었다.
눈을 뜨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남편은 운동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시계를 보았더니 정오가 가까웠다. 몸을 일으키자 몹시 어지러웠다. 열이 나서 목이 말랐고 손도 뜨거웠다. 도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원고를 써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단거리 경주의 스타트 라인에 선 것처럼 초조해졌다. 조금만 누워있으면 열이 내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자 머리는 더욱 지끈거렸다. 일어나 타이레놀을 찾아 두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누워서 눈을 감자 눈물이 양 쪽 눈 꼬리로 흘러 내렸다. 감정과는 상관이 없는 순전히 생리적으로 나오는 눈물이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자 갑자기 슬퍼졌다. 슬퍼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눈물이 흐르자 슬퍼졌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감정은 몸에 대한 반응으로 생기는건가. 감정이 몸의 상태를 이끄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정말 슬퍼서 눈물이 나지 않을까.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눈에 티가 들어가, 양파를 썰다가, 뭐 그런 식으로 눈물을 흘린 적은 있었다. 그러나 슬퍼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슬퍼서 눈물이 난다는 표현을 수도 없이 하며 살았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다고 착각을 했던 것일까.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눈물이 흐르니 정말 조금 슬퍼졌다.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감기 몸살 증세였다. 편도선이 먼저 부어오르고, 그 다음은 기관지와 좀 더 내버려 두면 폐로 염증이 퍼지는 순서였다. 기관지와 폐에 염증이 생기면 지독한 기침이 나를 망가트릴 게 뻔했다. 폐를 앓은 적이 있는 내게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병원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이마에 물수건이 놓여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고개를 움직였다. 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뼈 대신 고무나 지렁이 같은 것으로 바꿔 끼워놓은 것 같았다. 몸은 젤라틴처럼 바닥에 퍼져 눌어붙은 기분이었다. 남편이 물 컵과 약봉지를 들고 왔다.
"어젯밤에 뭘 했기에 이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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