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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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에서 몸을 돌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 전화를 받아 내게 건네주었다.

"전병헌입니다."

나도 모르게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뒷모습을 보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목에 가래떡이라도 걸린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색한 시간이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전병헌이 먼저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전화를 해 온 그 역시 침묵을 지켰다. 까짓 키스 한 번 했다고 단박 어색한 관계가 되다니. 둘 다 쿨하거나 드라이한 도회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지내셨어요?"

엄청난 속도로 두뇌를 회전시켜 겨우 쥐어짜낸 인사말이었다. 안녕하세요는 너무 의례적이다. 그렇다고 오랜만이라거나 반갑다고 말하는 것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목소리 톤은 솔정도의 높이다. 부동산 컨설팅 회사에서 텔레마케터들이 고객들에게 구매를 권유할 때 내는 음정. 너무 경쾌했나 하고 후회했다. 이미 나간 목소리다. 거둬들일 수 없었다. 계속 전진할 수밖에. 수화기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데 기계를 통과해 전달되는 목소리는 발랄하기까지 하다. 그는 묵묵부답이다. 전화가 끊겼나 하고 수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또 다시 침묵으로 빠지려는 순간에 전병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고 잘 받았어요."

"네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잘 들어간 원고를 전화까지 해서 잘 받았다고 말하는 의미.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제야 나는 조금 심각해졌다. 부동산 회사의 텔레마케터에서 동사무소 직원의 목소리로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고의 순서를 조금 바꾸려 합니다."

전병헌의 말은 내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잘 써진 원고도 아니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었다.

"만나서 조율을 할까 했는데 시간이 빠듯해서 전화로 양해를 구합니다."

이 정도면 조금이 아니라 원고와 상관없이 전병헌의 글과 그림으로 하겠다는 통고였다.

"작업 끝나면 술 한 잔 합시다."

그 말과 함께 전병헌은 사라졌다. 나는 이미 끊어진 전화기를 한참 동안 귀에 대고 있었다. 손가락 한 개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한참 후, 나는 수화기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멍하게 앉아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작은방으로 뛰어들었다. 전병헌에게 보낸 우주에 관한 여벌 원고를 찾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살펴보았다. 구성과 흐름이 삐걱거렸고, 페이지가 넘어가는 장면에서도 전혀 포인트, 말하자면 긴장미나 기대감이 없었다. 보내기 전에도 몇 번이나 검토를 했다. 그때는 눈에 띄지 않던 허술한 부분이 지금에야 보이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속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바다로 풍덩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콘티를 가지고 만화를 그릴 경우 약간의 변경은 늘 있는 일이다. 글을 쓰는 작가와 화백의 취향이랄까 서로의 생각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수정과 조율을 낳게 했다. 그런 경우 피차 기분이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졌고 양해를 하는 편이었다. 양쪽의 목적이 모두 좋은 책의 탄생에 있기 때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결점을 수정하는 경우도 있어 상대의 안목에 감탄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이런 식으로 굳이 양해를 구하지는 않는다. 대개의 경우 그럴 정도의 큰 부분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이 고쳐야 하는 글이라면 아마추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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