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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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 러브, 그것이 5%의 영역에 있었다. 우정, 지혜에 대한 사랑, 에로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랑이었다, 에로스적인 사랑과 플라토닉 러브를 합쳐서 100%를 다 채웠다. 그렇다면 김상우가 신화에서 발견해 분석해 놓은 자기희생적인 사랑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자기 비움, 자기희생은 어디에 자리한단 말인가. 100%의 위에, 모든 사랑의 범위를 벗어난 곳에 아가페 혹은 헤세드라 이름이 붙은 영혼의 사랑이 있다는 것인가.

지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사랑. 이것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신화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쓸 것인지, 아니면 재가공하여 현대적인 이야기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 결정을 해야 했다. 현대적이거나 신화적인 발상이거나 모두 막막했다. 자료를 대충 훑어 본 것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천지 창조 이전, 혼돈 속, 땅도 하늘도 나누어지지 않은 카오스의 상태였다.



스토리를 쓰기 전에 자료를 검토하다보면 대강의 윤곽이 잡히기 마련이었다. 주제와 스토리 라인이 자료 검토가 끝나갈 무렵쯤이면 그림이 그려졌다. 이번 일은 오리무중이었다. 실마리가 실 뭉치 속에 엉켜 들어가 찾을 수 없었다.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주방으로 가서 다 식은 커피를 커피 잔에 부었다. 구름이 걷혀 툭 터져있던 하늘에 다시 구름이 밀려왔다. 사방에 그림자가 드리우듯 어둑해졌다. 맨 발바닥에 밟히는 카펫이 눅눅했다. 장마 동안 내내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을 게 뻔했다. 베란다 창 아래로 보이는 나뭇가지는 축 늘어져 있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모든 게 무거워보였다.

밖을 내다보며 서서 식은 커피를 마셨다. 아무 맛도 향도 없었다. 이름만 커피뿐인 음료를 나는 습관적으로 삼켰다. 세상의 많은 일이 이런 식이 아닐까. 아무런 감동도 관심도 없으면서 타성으로 살아가는 일들. 똑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이 되풀이 하는 날들.

아침에 남편이 만든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의 감동이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은 이런 것일까? 문득 아침에 이런 식의 생활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 마치 전생인 것처럼 아득했다. 권태나 지루함이란 할일이 없을 때, 목표나 지향점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게 아니던가?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도 강한 동기와 강렬한 욕망에 떠밀려서 생겼다. 어째서 그런 것들이 부질없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몸 어딘가에 숭숭 구멍이 난 것처럼 눅눅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너무 방대한 신화를 정리하자니 능력에 부치고, 그래서 의기소침 해진 것일까. 자신감이 사라진 자신에 대한 방어 작용 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지식이란 파고들면 정리가 되게 마련이고 체계를 세우고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다보면 손에 잡힌다. 잔 바닥에 고여 있는 커피를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다시 컴퓨터를 켰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빠른 시간 안에 스토리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강의를 듣거나 관련 서적을 찾아서 좀 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상우와는 한 달에 한 번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김상우는 여름 방학 동안 여행 계획이 잡혀 있었고,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스터디로는 부족했다. 신화, 사랑과 여신, 수메르, 이집트, 그리스, 창세기, 에로스, 플라토닉. 아가페, 혼돈, 생명의 근원, 죽음 재생. 이런 낱말들을 검색해보았다. 컴퓨터 화면에 가슴과 엉덩이가 기형적으로 풍만한 벌거벗은 비너스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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