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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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과 밤새 그치지 않는 기침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다. 남편은 말없이 약을 사다 날랐고, 한밤중에 건너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있는 머리칼을 떼어주었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몽롱한 속에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나는 눈을 감은채 팔을 올려 머리를 쓸어주는 손을 힘없이 잡았다.

계곡의 물속에서 나를 끌어당기던 손이었다. 콘크리트 벽에서 대못을 빼듯 나를 끌어당기던 힘이 느껴졌다. 내 손은 뜨거웠는데 나를 잡고 있는 손은 서늘했다. 문득 알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면서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열어놓은 문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있는 검은 실루엣이 어둠 속에 떠 있었다.



"좀 괜찮아?"

남편의 묵직한 말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섬광처럼 날아오던 기쁨의 불꽃이 피시식 소리를 내며 꺼져버렸다. 나는 잡고 있던 남편의 손을 힘없이 놓았다. 남편은 한동안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가 내가 잠이 든 줄 알고 일어섰다. 남편은 등 뒤에서 소리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았다.

환청이 들릴 정도로 밤은 고요했다. 몸에서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결이 입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꺼져가는 전조 같았다. 약 기운때문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혼자서 어둠 속을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쓸쓸하고 견딜 수 없이 고독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평선에서 솟는 해처럼 아침이 느닷없이 다가왔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조금 창백했지만 몸은 가뿐했다. 오랜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탓인지 약간 설레기까지 했다. 장마가 끝나고 커다란 해가 얼굴을 내민 탓인지도 몰랐다. 그동안 덮어 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책갈피에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치자 옷을 벗은 여신의 사진이 나타났다. 수메르의 여신 인안나, 어디까지 보았는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 짙은 눈 화장을 하고 청금색 목걸이를 하고 남자에게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손짓하는 여신. 자신이 주관해야 하는 곡식과 생명들. 하늘과 땅으로 상징되는 여자와 남자의 교합. 생산의 원동력인 성적인 욕망. 나는 그동안 정리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인안나만으로는 줄거리가 엮어지지 않았다. 단편적인 이야기는 어느 것과도 결합되지 않고 혼자서 맴돌았다. 이집트와 그리스 여신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성녀의 스토리를 함께 공부하지 않으면 충실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무심히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 순간 아무 관련도 없는 페이지를 뒤적이는 나를 발견했다. 시간을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리둥절해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앞에 컴퓨터가 놓여있었고, 나는 책상에 앉아있었다. 책을 덮고 방을 나왔다.

베란다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눈부신 햇빛이 아파트 마당의 나무 위에 쏟아졌고, 주차장의 자동차가 이제 곧 폭염으로 변할 공기를 이고 있었다. 까닭없이 거실을 서성거렸다.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머리 위로 치솟아 오르는 태양이 숨통을 조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것인가? 서성대며 생각했다. 밤마다 터져 나오는 기침 탓인지도 모른다.

날이 밝으면 멀쩡한 것 같지만 역시 밤새 쿨룩대느라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가슴 X-레이 사진을 찍은 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달력을 보니 예약 날짜가 훌쩍 지나있었다. 허둥지둥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 앉았다. 평소에는 번거로워 눈 화장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나는 푸른색으로 눈두덩 주변을 발랐다. 몇 번이나 덧칠했다. 화장대에서 일어서기 전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내 목에는 커다란 청금색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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