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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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에 들뜬듯 나는 버스를 탔다. 외벽이 온통 하얀 색인 병원 건물이 보였지만 그냥 지나쳤다. 버스에서 내린 후, 전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은 어둠 속 터널을 빠른 속도로 달렸다. 지하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무작정 걸었다.

몸이 이끄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중지했다. 발길이 멈춘 곳은 전병헌의 사무실이 들어있는 빌딩 앞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건물을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십 오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고, 로봇처럼 복도로 발을 내밀고, 뚜벅뚜벅 걸어가 벨을 눌렀다. 불과 몇 시간동안 이 모든 일을 해치웠다. 숨도 쉬지않고 단숨에 벨을 눌렀다. 내 몸뚱이에서 나는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진하게 화장한 두 눈과 청금색 목걸이를 건 목만을 남겼다. 자기 최면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적어도 전병헌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전병헌을 보자 나는 그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눈 주변에 귀와 입과 머리가 생겼고, 목을 중심으로 가슴과 배와 팔 다리가 순식간에 붙어버렸다. 나는 문 앞에 서서 허둥댔다.

"부근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렀어요. 작업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지……."

내 입을 쥐어박고 싶었다. 이런 판에 박힌 빤한 이유를 대다니, 좀더 그럴듯하게 전병헌이 속아 넘어갈 깔끔한 핑계를 준비하지 못한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전병헌은 문에서 조금 비켜섰다.

나는 엉거주춤 전병헌이 내 준 공간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거실에는 기다란 책상이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열 평 남짓되는 공간이었다. 컴퓨터와 만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 정리되어있는 책장 비슷한 가구가 있었다. 작은 주방이 거실 한 구석에 박혀 있었고, 문이 닫힌 방이 하나 있었다. 침실인 모양이었다. 전병헌은 작은 테이블 앞에 의자를 끌어다 주고는 앉으라고 했다. 손님 접대용 소파는 없는 걸로 보아 이곳에 나 같은 불청객은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 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는 벽을 마주보며 의자에 앉았다. 무성한 숲이 손에 잡힐듯 가까웠다. 은종이로 만들어 매달아 놓은 것 같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물거품처럼 반짝거렸다. 유리로 된 벽이 바깥 세상의 모든 소음을 차단했다. 사무실은 너무나 고요해 마치 물속 같았다. 초록빛 산을 한참 보고 있으려니, 내가 물고기가 된듯 했다. 허리 아래로 뻗은 두 다리가 유선형의 꼬리로 변하는 것처럼 스멀거렸다. 나도 모르게 종아리를 쓸어내렸다.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아가미가 생길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 유리벽으로 다가갔다.

"점심, 했어요?"

전병헌이 바퀴 달린 의자를 맞은 편으로 끌어오면서 물었다. 나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커피, 차?"

전병헌은 주방으로 가면서 간단히 물었다. 커피 물을 올리고 작은 냉장고에서 전병헌은 부스럭대며 무언가 꺼내기 시작했다.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나는 유리벽을 마주 보고 섰다. 투명한 유리때문에 마치 사무실이 그대로 바깥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 감각이 느껴졌다.

물 속에서 움직이듯 나는 천천히 원피스의 단추에 손끝을 갖다 댔다. 맨 위의 단추를 풀어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전병헌이 양 손에 머그 컵을 하나씩 들고 내게 왔을 때 나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몸으로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전병헌의 얼굴에 햇빛이 쏟아졌다. 양 팔을 올려 가슴을 가리며 나는 전병헌의 눈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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