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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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기 전에 손이 움찔거렸다. 섬광처럼 머릿속으로 탄식이 스쳐갔다. 후회와 뒤섞인 탄식은 순식간이었고,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문이 열렸고 그림자처럼 나는 거실로 들어섰다. 변명거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신이 아둔하게 느껴졌다. 남편의 존재를 알리는 텔레비전 소리가 실내를 떠다녔다.

"저녁은?"



일단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먼저 질문을 했다.

"늦으면 전화라도 해야지. 어딜 갔던 거야?"

남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미서와 이야기 좀 하느라고. 요즘 힘든 가 봐."

이럴 때 보면 나는 마치 연극배우 같았다. 아니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거짓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할 정도로 친밀한 사람이 없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거짓말을 할 정도의 상황에 몰리면 숫제 입을 다물어버리는 편이었다. 거짓말을 한 후, 께름칙한 마음으로 불편한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고지식해서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라도 움켜잡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지 모른다.

"김이사는 일 년에 절반은 해외출장이고, 결혼한 이후엔 글도 전혀 못쓰고 있대."

주방 쪽의 식탁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 순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열개의 문장으로 말을 했다면 그중 아홉 개는 진짜고 나머지 한 개만이 거짓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은 몽땅 거짓말이다. 나머지 아홉 개보다 힘이 센 사실 하나가 다른 것들의 기반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서와 함께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보다는 미서의 형편과 미서가 처한 상황과 마음상태에 대한 나머지 아홉 개를 설명했다. 필요이상 자세한 내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테일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구체성을 부여해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쉽게 믿도록 한다. 이것은 글을 쓸 때도 적용되는 기법중의 하나다.

"얼굴이 반쪽이 됐어. 미서네 집 근처 리틀 타이란 태국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나온 음식을 반도 못 먹더라고. 쇠고기를 볶아서 샐러드처럼 만든 것, 이름이 뭐더라, 까먹었네. 카레도 나왔어. 맨 먼저 딤섬을 주더라. 딤섬은 동남아 쪽의 공통 요리인가 봐."

언젠가 미서와 함께 먹은 저녁식사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몸에 딱 붙는 태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서빙을 하던 종업원도 기억났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던 실내의 중앙을 지나는 기다란 직사각형의 작은 분수에서 흐르던 물소리와 삼 십 센티 쯤 공중으로 뿜어져 올라와 원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던 물줄기도 생각났다. 후식으로 나왔던 밤톨만한 다디단 열대과일과 이국적인 무늬로 만들어진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품이 붙어 있던 벽도 생각났다. 반년도 훨씬 더 넘은 저편의 장면이었다. 말을 할수록 미서와 함께 먹었던 상황이 상세하게 그려졌다. 접시를 들고 와 어느 쪽에 먼저 놓을까 망설이던 종업원의 머뭇거림, 입에 넣기 차마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딤섬의 작은 주름들, 나박썰기 비슷한 모양으로 썰어 넣은 카레속의 감자까지 모든 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밤새도록이라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지루한 듯 어느 새 졸고 있었다.

"그 집 맛도 괜찮고, 분위기도 좋더라. 언제 한 번 가 볼까?"

나는 소파에서 졸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편의 고개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방비 상태의 인간에게는 연민이 느껴지는 것 일까. 근육이 긴장을 풀어버린 얼굴은 남편이라고 말할만한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남편이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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