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저녁은?"
일단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먼저 질문을 했다.
"늦으면 전화라도 해야지. 어딜 갔던 거야?"
남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미서와 이야기 좀 하느라고. 요즘 힘든 가 봐."
이럴 때 보면 나는 마치 연극배우 같았다. 아니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거짓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할 정도로 친밀한 사람이 없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거짓말을 할 정도의 상황에 몰리면 숫제 입을 다물어버리는 편이었다. 거짓말을 한 후, 께름칙한 마음으로 불편한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고지식해서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라도 움켜잡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지 모른다.
"김이사는 일 년에 절반은 해외출장이고, 결혼한 이후엔 글도 전혀 못쓰고 있대."
주방 쪽의 식탁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 순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열개의 문장으로 말을 했다면 그중 아홉 개는 진짜고 나머지 한 개만이 거짓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은 몽땅 거짓말이다. 나머지 아홉 개보다 힘이 센 사실 하나가 다른 것들의 기반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서와 함께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보다는 미서의 형편과 미서가 처한 상황과 마음상태에 대한 나머지 아홉 개를 설명했다. 필요이상 자세한 내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테일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구체성을 부여해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쉽게 믿도록 한다. 이것은 글을 쓸 때도 적용되는 기법중의 하나다.
"얼굴이 반쪽이 됐어. 미서네 집 근처 리틀 타이란 태국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나온 음식을 반도 못 먹더라고. 쇠고기를 볶아서 샐러드처럼 만든 것, 이름이 뭐더라, 까먹었네. 카레도 나왔어. 맨 먼저 딤섬을 주더라. 딤섬은 동남아 쪽의 공통 요리인가 봐."
언젠가 미서와 함께 먹은 저녁식사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몸에 딱 붙는 태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서빙을 하던 종업원도 기억났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던 실내의 중앙을 지나는 기다란 직사각형의 작은 분수에서 흐르던 물소리와 삼 십 센티 쯤 공중으로 뿜어져 올라와 원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던 물줄기도 생각났다. 후식으로 나왔던 밤톨만한 다디단 열대과일과 이국적인 무늬로 만들어진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품이 붙어 있던 벽도 생각났다. 반년도 훨씬 더 넘은 저편의 장면이었다. 말을 할수록 미서와 함께 먹었던 상황이 상세하게 그려졌다. 접시를 들고 와 어느 쪽에 먼저 놓을까 망설이던 종업원의 머뭇거림, 입에 넣기 차마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딤섬의 작은 주름들, 나박썰기 비슷한 모양으로 썰어 넣은 카레속의 감자까지 모든 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밤새도록이라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지루한 듯 어느 새 졸고 있었다.
"그 집 맛도 괜찮고, 분위기도 좋더라. 언제 한 번 가 볼까?"
나는 소파에서 졸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편의 고개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방비 상태의 인간에게는 연민이 느껴지는 것 일까. 근육이 긴장을 풀어버린 얼굴은 남편이라고 말할만한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남편이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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