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국제연극제 국내공식초청작 중 하나인 ‘선녀와 나무꾼’은 우리 전통설화를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대사 없이 음악과 몸짓으로만 극이 이루어지며, 소박한 무대에서 소품의 재배치를 통해 장면 전환을 표현한다.
몇 개의 나무 막대가 나무꾼의 오두막이 되기도 하고, 등장인물 간의 마음의 벽이되기도 하며, 때로는 삶의 무게에 압도당한 선녀가 매춘을 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단아하고 상징적인 무대와 신비로운 느낌의 조명, 라이브로 연주되는 국악은 관객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전래설화 선녀와 나무꾼은 주로 나무꾼의 입장에서 이야기된다. 나무꾼은 선녀를 아내로 맞아 행복해졌다가 그녀가 아이 셋을 낳기 전에 날개옷을 돌려줌으로써 불행해진다. 이야기의 주체도 나무꾼이고 우리가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도 나무꾼이다. 그러나 극단 ‘초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르다. 목욕하는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 이는 나무꾼이 아니라 그의 늙은 어머니다. 이로써 ‘선녀와 나무꾼’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된다.
연극 ‘선녀와 나무꾼’의 주인공은 나무꾼이 아니라 선녀다. 나무꾼의 노모는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가를 못 간 아들을 위해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다. 이로써 지상의 낯선 공간에 첫 발을 디딘 선녀는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나무꾼과 노모는 선녀에게 이질적인 공간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데, 이것은 선녀에게는 일종의 폭력이다. 이 과정에서 선녀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과도 같다.
이 작품은 꼬리를 물고 덮쳐오는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여성의 이야기이고 민중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극단 ‘초인’이 보여주는 선녀의 안타까운 삶에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폭력을 이겨내는 선녀의 모습에 여성 이미지에 대한 전형적 한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생소한 공간에 마주한 선녀는 처음에는 강한 거부의 몸짓을 보이지만 차츰 그것에 익숙해지고 만다. 결국 삶의 고통스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익숙해지는 것’ 뿐이라는 듯이.
그녀가 강간당한 후 담배를 피우며 매춘을 하는 장면 역시 불쾌하다. 담배는 남성캐릭터에게는 ‘방황’의 상징이지만 여성캐릭터에게는 ‘탈선’의 상징이다. 강간 후 매춘으로 이어지는 상황 역시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겨내는’ 끈질긴 삶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선녀가 자신의 삶에 밀어닥친 폭력들을 이겨내는 동기는 역시 ‘모성’이다. 강인한 모성은 여성에게 필수적인 덕목인가? 이 과정에서 선녀의 여성성은 무시되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어머니의 이미지는 위대함의 가치를 획득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여성이 약자로서 폭력적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의문스럽다.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이러한 어머니상은 숭고함과 위대함의 가치를 입고 그녀들의 ‘자식’에게 또 다른 폭력을 행하는 것은 아닌가.
‘선녀와 나무꾼’은 한 여자의 기구한 삶을 보여주고, 삶 속의 폭력들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이상이 없다. 고통스런 폭력에 맞서며 생의 끈을 놓지 않는 선녀 내면의 강인함이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선녀가 보여주는 삶의 생명력은 잡초의 억척스러운 강인함이 아니라 일종의 체념이다. 그녀의 귀천이 한의 승화가 아니라 생에서의 도망처럼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 임지혜 청소년문화기자(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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