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 100人·89]작곡가 최영섭

겨레 가슴적시는 선율 '한국가곡의 전령사'
   

   인천종합문화회관 앞 공원 한 편에 서 있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2000년 8월 15일 제막) 하단에 적힌 글은 작품의 탄생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온 겨레의 절절한 국토 사랑 겨레 사랑을 어찌 막아설 수 있으랴 이 세상의 어떠한 이념도 어떠한 사상도 겨레보다 우선하여 있지는 못하는 것이니 언젠가는 다시 금강산 순례의 길이 열릴 것을 겨레는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 기도가 인천에서 태어나 성장해 시인으로서 작곡가로서 대성한 한상억, 최영섭 두 분 선생에 의해 아름다운 말과 율을 얻어 1961년 세상에 울려 퍼지니 국민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다 …."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한국전쟁 11주년 기념으로 KBS의 청탁을 받아 작곡가 최영섭(78)과 시인 한상억(1915~1992)이 공동 작업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중 한 곡이다. 강화 출신 두 예술가가 만든 이 칸타타는 '동해의 여명'과 '정선 아리랑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비롯해 산·강·바다를 각각의 주제로 한 3곡, 이렇게 모두 11곡으로 구성됐다. 이 중 '그리운 금강산'은 산에 해당하는 노래 중 한 곡으로 산뜻한 가락과 애끊는 호소력으로 맵시있게 짜여졌다.



   일요일이었던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아직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노 작곡가를 마주했다. 최영섭에게 2007년은 보다 각별한 해다. 1957년 그가 첫 작품을 발표했으니, 올해로 그가 음악을 만들어 온 지 60주년.

   "작곡 60주년을 기념해 올해 하반기 가곡 150곡, 칸타타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전 24장을 수록한 작품집을 재출판하려 합니다. 때문에 작품 손질하고 교정보며 막바지 작업에 매달리고 있어서 최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네요."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화두는 자연스레 '그리운 금강산'으로 이어졌다.

   "1961년 KBS 측의 청탁을 받아 인천 숭의동 집에서 작품을 썼습니다. 한상억 선생의 시와 함께 해방 후 금강산을 구경하고 온 삼촌의 이야기에 담긴 심상 등이 작품에 잘 어우러져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다고 생각합니다."

   
  ▲ 2000년 8월 15일에 열린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제막식 모습.  
   이 작품은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즈음 실향민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모든 국민에 의해 불리며 '국민 가곡'으로 애창됐다. 또한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성악가 안젤라 게오르규, 볼쇼이 합창단, 미샤 마이스키(첼로)까지 이 작품을 음반에 수록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기념 쓰리(3) 테너(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공연에서도 불리며 세계인들에게 감동의 선율을 선사했다.

   그는 1929년 강화군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오르간을 칠 수 있었던 가정 환경으로 인해 찬송가를 화음으로 연주하는 실력이 제법일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이사온 최영섭은 창영초교를 다니면서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인천중학 시절의 일화를 들려줬다. "당시 인천중 강당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음악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에겐 절대로 못 건드리게 했어요. 하지만 저만은 허락해 주셨죠. 이후 피아노는 제 차지가 되었고 틈틈이 피아노를 닦고 연주했습니다."

   당시 독자였던 그가 실제로 음악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그의 재능을 알면서도 사회 통념상 음악가의 길을 한사코 막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를 믿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을 권한 것은 어머니 신수례(1908~2003) 여사였다.

   "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지금의 최영섭도 없었죠. 어머니께선 '돈과 명예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고 독려해 주셨습니다. 금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죠."

   어머니의 후원을 등에 업은 그는 1945년 서울 경복중으로 전학, 인천에서 통학하며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이후 고1 때였던 1947년 첫 작품인 가곡 '그리운 옛 봄'을 작곡, 이어서 피아노 환상곡 '해변', 피아노 모음곡 '절름발이 인형의 슬픔' 등으로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 1998년 11월 금강산에 오른 최영섭씨.  
   최영섭을 있게 한 신수례 여사는 1998년 정부로부터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1965년 활동을 위해 서울로 이사한 최영섭은 방송음악인이자 편곡지휘자, 또한 시간을 내 대학 강단에도 서며 어느 한 부분 소홀함 없이 일을 해 나갔다. 특히 KBS FM '최영섭의 클래식 살롱', KBS TV '우리들의 애창곡', MBC FM '나의 음악실' 등은 1980년대 클래식 음악팬이었다면 기억 저편에서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프로그램들이다.

   그는 현재까지 40년간 이어지고 있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양파에 비견했다.

   "그간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일과 사람, 명예, 금전적인 부분까지 모든 것을 얻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마치 양파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벗기고 또 벗겨도 알맹이 없이 껍질만 남는 양파말입니다. 반면 인천에선 진정한 '나'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지역분들에게 받은 영향은 무척이나 컸습니다. 특히 한상억, 조병화 선생과의 만남은 제 작품을 특징화하는 요소로도 작용했습니다."

   이런 그도 '음악'에 대한 아픔은 있다. 음악가로서 길을 걷는 것을 후회한 적이 딱 한 번 있단다. 30여 년 전 음악에 미쳐 가족을 돌보지 못했고, 이 탓에 그의 부인이 위암 말기였던 것을 챙기지 못해 그냥 세상을 떠나게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최영섭은 "가곡 200여곡, 합창, 기악곡, 오페레타와 오페라, 기관단체가 등을 모두 합쳐 500여 곡을 작곡했어요. 이제 제가 진정 걷고 싶었던 길을 가려 합니다. 김소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이는 것이죠. 그간 소월 시의 깊이를 좇지 못해 범접하지 못했는데, 이제 적당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울러 그간 제 작품의 특징인 향토적이면서 국민주의적 색채를 탈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최근 15년간 작곡한 작품들이 전체 작품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근래 창작욕이 샘 솟는 등 음악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합니다. 이제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몸이 다하는 날까지 음악과 함께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ky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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