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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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헌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 노선표를 두꺼운 골판지 위에 이어 붙였다. 사진을 종류와 크기별로 코팅을 해보기로 했다. 코팅하지 않은 사진과 비교해 본 후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쪽을 선택할 작정이었다. 작업은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어두워지려 했다. 둘 다 일에 열중하고 있던 터라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은 그만해요. 내일 다시 하죠."



고맙다는 말 대신 엉뚱한 말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미안해서 전병헌을 향해 그냥 웃어버렸다.

"배 안 고파요? 제가 저녁 살게요."

조금 큰 소리로 다시 말하자 전병헌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나는 흩어진 골판지 조각과 나무막대와 비닐 조각들을 쓰레기 봉지에 쓸어 담았다. 창문을 닫고 작업실을 정리 한 다음 전병헌과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중국집의 서쪽으로 난 창을 통해 마지막 석양이 탁자 위에 한 줄기 앉아 있었다. 대기는 이미 검정색을 띤 보랏빛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전병헌이 내 손을 잡고 끌었다. 전병헌은 한 줄기 석양이 비치고 있는 탁자 위로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탁자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고, 전병헌은 윗옷을 턱으로 밀어 올려 옷 속으로 그의 얼굴을 들이 밀었다. 그의 입김이 양쪽 가슴 사이에 가득 차 무거워졌다. 나는 천천히 탁자 위로 몸을 눕혔다.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석양 한줄기가 얼굴을 가로질렀다. 나는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화려한 빛을 뿌려댔을 현란한 조명이 홀 천장 중앙에 높이 매달려 있었다. 샹들리에는 활짝 핀 커다란 꽃처럼 사방으로 퍼져있었다.

전병헌은 꿀을 빨아먹는 벌처럼 젖꼭지를 입속에 넣었다. 부드러운 혀끝이 꽃에 박아 넣은 벌의 침처럼 점점 날카롭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팔을 올려 전병헌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얼굴에 드리웠던 마지막 석양이 사라졌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창으로 더 이상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유리로 만들어진 장식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빛을 반사했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천장에 매달린 유리 전등은 나팔꽃처럼 어둠 속으로 스스로 몸을 숨겼다. 전병헌이 목이 꺾인 수선화처럼 툭 떨어져 내렸다. 눈을 뜨고 어둑한 허공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하늘에서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폭죽처럼 마음이 화려하게 활짝 살아나면 좋으련만 왜 고독한지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공중으로 손을 내 뻗었다. 전병헌이 피워 올리는 담배연기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갈 뿐 손가락 사이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중국집을 나와 전병헌은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키 낮은 우윳빛 전등이 켜져 있는 카페에서 맥주를 시켜놓고 마주 앉았다. 부드러운 거품이 이는 맥주를 보며 생각했다.

섹스 후에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것은 설거지나 청소기를 돌린 후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불현듯 전병헌을 다시 한 번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놓인 전병헌의 손등에 내 손을 올렸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투명한 유리잔 속에서 작은 거품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함께 앉아 있으니 당신이 점점 좋아져요. 서늘한 가을 밤, 맥주잔에서 이는 거품 소리, 전해지는 손바닥의 온기, 이 모든 게 더 없이 사랑스러워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침묵을 지켰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끌어내 표현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어려웠다.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감정 뒤에 비릿한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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