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94]화가 황추

지역미술 色 발하다

윤문영 기자

발행일 2007-10-17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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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의 불모지라는 인천, 게다가 먹고 살기에 바빴던 50~60년대.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 미술계를 주도하던 인물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인천 미술계에서의 그의 위치에 비해 지금은 이름조차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같이 활동했던 미술계 원로들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화가 황추(1924~1994). 누를 황(黃), 가을 추(秋). 황추를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이름이 캔버스 위에 칠해진 색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풍경화를 집중적으로 그린 그의 그림 속에는 가을 분위기를 나타내는 노랗고 붉은 계통의 색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다.

   인천여성작가 연합회 고문인 김옥순(76·여)씨는 "황추 선생은 바다풍경이나 석양을 많이 그렸는데, 바다를 그릴 때도 해가 뜨거나 질 때에 붉게 물든 바다를 위주로 그렸다"며 "그러다보니 따뜻한 느낌이 나는 붉은 색조의 그림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인천미술협회 고문인 이철명(72)씨도 "황 선생이 마지막 전시회에서는 추상화를 그려내기도 했지만 석양을 그려낸 풍경화가 대부분이었다"며 "노란색과 주황색 계통으로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려낸 투박한 스타일의 그림이 많았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생각해 일부러 붉은 색 위주의 화풍을 잡아나간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이름과 그림 모두 '황추'라는 단어로 드러낼 수 있을듯 싶다.

   그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입선, 특선 등을 거머쥐면서 인천뿐만 아니라 중앙 화단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미술평론가 이경모씨는 "지금은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당시에는 국전이 작가로 인정받기 위한 유일한 등용문이었고 황 선생은 여기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면서 국전 초대작가까지 됐다"고 설명했다.

   
  ▲ 태양이 있는 마을(1985년作)  
 
   
  ▲ 항구(1963년作)  
 
   
  ▲ 무제(1980년作)  
   황추는 1958년 국전을 시작으로 아홉 차례에 걸쳐 입선을 차지했고 1966년과 1967년에는 연거푸 특선을 받았다. 특선을 두 번 타게 되면 국전의 '추천작가' 자격을 얻어 작품의 출품은 가능하지만 심사는 받지 않게 돼 있다. 두 번의 특선 경력으로 추천작가가 된 황추는 이 때 다섯번 작품을 출품하게 돼 총 16차례나 국전에 작품을 걸게 됐다. 추천작가가 된 이후 2년이상의 활동경력이 인정된 뒤 황추는 국전의 심사위원 자격이 있는 '초대작가'가 됐다.

   또 문화공보부가 주최하는 현직작가초대전과 대한미술협회전에 작품을 출품, 1975년에는 한국미협전에서 이사장상을 받기도 했다. 이로써 1971년 대통령장 문화훈장을 수상한 화가 박영성씨와 함께 인천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게 됐다.

   192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황추는 1947년 해주미술학교에서 서양화 표현기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 때 서양화단의 원로로 알려진 박성환 화백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고향 해주를 떠나 인천으로 오게 된 그는 1953년 인천 송도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한다. 24년간 교사로 재직할 당시 그림에 대한 애착을 갖고 끊임없이 미술에 매달려왔던 것으로 당시 작가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황추의 제자였던 화가 박송우(66)씨는 "황 선생님이 군부대에서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미술에 관심은 많았지만 대학수준 이상의 전문 교육은 받지 못한 것으로 들었다"며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황추가 나온 해주미술학교는 현재의 전문학교 수준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6·25전쟁 이후 당시 문교부에서 미술을 정규과정으로 만들면서 부족한 교사들을 대거 확보하던 시기에 황 선생님이 송도고등학교에 부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다른 학교 미술교사였던 박영성, 장선백, 박응창, 김옥순 선생 등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던 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미술에 더 매진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화가들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해온 터라 학교를 중심으로 미술계의 활동이 이뤄졌던 시기였다. 황추는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되기 전에 경기도 미술교사 협회 회장직을 맡으며 교사들 사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1965년에는 대한미술협회 경기도지부장을 맡고 제4회 경기도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지역 미술계를 이끌어 '미협 맨'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는 인천에서 1959~64년 당시 미협회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앙데팡당전'을 여는 등 지역사회 미술전 곳곳에 작품을 출품했다. 1963년을 시작으로는 개인전을 11차례나 지속적으로 여는 등 화가로서의 작품활동에 매진했고 인천 라이온스 클럽의 회원으로서 지역을 위한 봉사에도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교사로서 학생들의 지도에도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제자 박씨는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서 학생들한테 그림공부를 시켰고, 당시 대학에서 실시하는 각종 미술대회에서 자기 학생들이 큰 상을 받게 하려고 정말 기를 쓰고 가르쳤다"고 밝혔다.

   이렇게 국내에서 화가와 교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황추가 1976년 돌연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시카고로 이민을 가게 됐다.

   당시 미협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철명씨는 "이민 즈음에 중구의 답동관이라는 식당에서 송별회를 하면서 황 선생에게 국문과 영문으로 공로상을 만들어 전달했던 것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며 "당시 이민이 쉽지 않았을 땐데 중앙정보부 쪽에서 일했던 황추 선생의 동생이 미국으로 파견을 가면서 초청이민을 도운 것으로 안다"고 했다.

   미국에서도 시카고 시장 초대 개인전이나 LA현대 미술관 초대전, 워싱턴 국립미술관 초대전 등에 참여하고 한인미술협회를 조직하는 활동을 해왔지만 국내에서만큼 인정받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여 원로 화가들은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김옥순씨는 "누런 황소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그림만 그리셨던 분이셨다"며 "황 선생이 미국에 가시지 않았더라면 국내에서 더 활동을 많이 하시고 좀더 오래 사셨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황추는 미국에서 20여년 가까이 살면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 엄청난 벌금을 물면서 경제적인 타격도 입는 등 타국에서 생활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단다. 그의 딸이나 부인이 김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황 선생이 많이 외로우신 것 같으니깐 미국으로 와서 함께 활동해보라는 내용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는 1985년 귀국해 여의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고 1988년에는 인천 몽마르트 화랑에서 두 번째 귀국전을 했다고 한다. 이 때에는 기존의 풍경화 위주에서 벗어나 추상화로 전환해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단다.

   이경모씨는 "황추 선생이 인천의 미술계를 주도하며 쌓아온 업적에 비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지금이라도 황추 선생을 재조명하고 인천의 인물로 되살려 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윤문영기자·moono7@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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