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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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미서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커다란 범죄행위라도 되는 듯 따져 물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분한 마음이 치솟았다.

"미서가 말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자신이 정리를 해 보겠다고 하면서……."



"미서와는 언제부터 만났어요?"

질문 자체를 후회했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미서가 결혼하고 난 후에요?"

전병헌은 심해처럼 깊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병헌과 마주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미서라니,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카페를 나왔다. 몸이 거센 급류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마을버스가 천천히 곁을 지나갔다. 이 모든 게 장난이었으면 싶었다. 어금니를 물었다. 지금은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내리지 말자. 부서지지 않게 내 자신을 조심조심 다루어 집에 까지 가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뛰지도 빨리 걷지도 않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부리를 내려다보며 걸었다.

뒤에서 전병헌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서서 뒤 돌아 보았더니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환한 햇살이 검은 아스팔트 길 위에 내려앉은 고즈넉한 가을 한낮이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혀가 묵직하게 목에 걸렸다. 허둥거리며 다가오는 전병헌과 마주 서 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나는 차도로 성큼 내려갔다. 때마침 빈 택시가 와서 멈추었다. 나는 문을 열고 택시 속으로 몸을 말아 넣었다. 작고 낮은 공간이 엄마 뱃속처럼 아늑했다.

택시는 불순물이 전혀 있지 않을 것 같은 가을 한복판을 달렸다. 나는 두 손을 깍지 끼고 무릎에 얹은 채 석상처럼 앉아있었다. 길에 서 있는 가로수에서 낙엽이 몇 장 떨어져 내리면서 바람에 날렸다. 하늘이 너무 푸르러 눈이 부셨다.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지중해의 바다 빛이 아마도 저런 색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서야, 지금 어디 있니?

하늘을 쳐다보며 이럴 땐 화를 내야 하나? 눈물을 흘려야 하나? 생각했다. 택시 운전사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면 내 입은 아마도 돌처럼 굳어 버렸을 거다.

어째서 미서는 늘 내 앞에서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째서 미서의 뒤만 따라 다니는가도 알지 못했다. 만약 눈앞에 운명이 있다면 두 손으로 부셔버리고 싶었다. 저주의 말을 퍼부어 익사시켜버리고 싶었다.

지하철 역사 앞에서 택시를 내려 전철로 갈아탔다. 집까지 그냥 택시로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어떤 고통이나 아픔이라도 사람을 바닥까지 뒤흔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통 속에 빠진 나를 연기하는지도 몰랐다. 사는 것은 한 바탕 연극이다. 어떤 역할로든 변신할 수 있고 어떤 역이든 내게 주어질 수 있다. 나는 책을 읽어가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부서지는 것은 피하자. 미서야, 우리 부서져서 가루가 되지는 말자.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전병헌이 밉거나 야속하지도 않아. 질투도 나지 않아. 사랑이란 원래 이런 거잖아. 삼각관계나 사각 혹은 거미줄처럼 뒤엉키는 관계. 그냥 돌아 와. 아무런 생각하지 말고 우선은 내 앞에 나타나 줘. 그래야 내 자신을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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