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96]前 인천상의 회장 채호

경기은행 전신 인천은행 설립 '산파역할' 경제발전 주춧돌 '지역자본' 집대성

이창열 기자

발행일 2007-11-14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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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1월21일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다. 'IMF 사태'의 시작이었다. 기업은 망했고 가장(家長)은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자살자가 속출했다. 대혼돈이었다.

   온 나라를 공황상태에 빠뜨린 IMF사태는 1997년 중반 대기업의 연쇄 부도에서 촉발됐다. 한보그룹이 망했고 기아, 진로, 대농, 한라, 대우 등의 주인이 바뀌었다. 대기업 부도에 따라 은행들은 거액의 부실채권을 떠안게 됐다.

   급기야 팽팽히 당겨진 금융발 뇌관은 터졌고 지역 금융계에 핵폭풍으로 몰아쳤다. 이듬해인 1998년 2월 인천·경기의 유일한 지역은행이었던 경기은행이 '부실은행'의 명단에 올랐다. 경기은행은 이후 4개월여동안 중앙정부에 대한 탄원과 진정 등 인천지역 각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화, 동남, 대동, 충청은행 등과 함께 그해 6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인천시민들은 경기은행 퇴출을 아쉬워했다. 그뒤 10여년이 지났다. 경기은행은 이제 지역 주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이 경기은행을 탄생시킨 사람은 바로 채호(蔡浩·1909~1970) 전 인천상의 회장이다.

   
  ▲ 인천은행 개업:경기은행의 전신인 인천은행은 1969년 12월8일 인천 중구 사동에서 개업식을 열고 본격 영업에 들어갔다.  
     
   채호 전 회장은 1959년부터 1970년까지 인천상의 회장(제5·6대)·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부평구 효성동 일대에 인천수출산업공단이 조성됐고 남구 주안 폐염전 부지에 제2단지가 들어섰다. 서울~인천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됐고 국철은 복선화되면서 운행 횟수를 대폭 늘릴 수 있었다. 인천항이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전면 도크화 사업이 추진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대기업들의 서울본사를 인천으로 유치하기 위한 운동을 활발히 벌여 인천제철(현 INI스틸)과 한국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이 인천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율도화력발전소와 부평디젤발전소, 경인에너지 등은 지역의 수많은 공장에 풍부한 전력을 공급하며 힘을 보탰다.

   인천은 이 기간 1950년 6·25 이후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공업 도시에서 수출 주도형 전통 공업도시로 면모를 갖췄다. 이를 바탕으로 1960~1970년대 인천지역 기업들의 수출액은 국내 전체에서 20% 가량을 차지하며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소릴 들었다.

   그러나 채호 전 회장은 지역 중소기업들이 늘어나는 설비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현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서울을 본사로 둔 시중은행들의 지점에 흡수된 은행 자금이 지방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중앙으로 빨려들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인천지역 중소기업들은 융자를 받기 위해 시중은행의 서울본점과 지점을 번갈아 드나들어야 했다.

   
   김한호(65) 전 인천상의 사무국장은 "채호 전 회장은 당시 지역 중소기업인들로부터 이같은 현실을 듣고 지방은행 설립을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며 "채호 전 회장의 구상은 수출과 경제발전을 지상과제로 삼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으로 탄력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1월17일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지역적 자본을 집대성하여 그 지역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동원을 위해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채호 전 회장은 곧바로 그해 2월 인천상의를 중심으로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인천은행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인천상의에는 별도로 전담팀을 만들어 인천지역 상공인들을 대상으로 주주 모집에 나섰다.

   인천은행은 2년여의 노력으로 1969년 11월 수권자본금 3억원 중 1억5천만원을 불입하면서 창립총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인천은행 설립에는 18개 향토기업과 개인 152명이 주주로 참여했다. 초대 은행장에는 한국은행 부행장을 역임한 이상윤씨가 선임됐다. 1969년 12월 8일 개점 첫날 하루동안 3억2천100만원의 예금고를 올렸다. 그동안 지방은행 설립에 목말랐던 인천시민들의 갈증을 웅변한 것이다.

   인천은행 설립은 1967년 10월 개점한 대구은행을 시작으로 부산, 충청, 광주, 제주은행에 이어 전국에서 6번째였다. 개점식에는 정일권 국무총리와 서진수 한국은행 총재 등이 참석했다.

   채호 전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국내 은행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어 지방경제 발전에 여러모로 지장을 준다"며 "인천은행 발족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인천금융은 시민들의 은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인천 시찰:고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1월 부평구 효성동 일대에 조성된 인천수출산업공단을 시찰했다. 채호(우측) 전 인천상의 회장이 영접하고 있다.  
   인천은행은 창립 3년을 맞은 1972년 6월 경기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설립 당시 자본금 1억5천만원은 1998년 6월 퇴출 전에는 2천2억원으로 2천배 이상 성장했다. 1998년 5월말 기준으로 총 자산은 8조5천322억원으로 인천과 경기·서울에 모두 193개의 영업점을 운영할 만큼 성장했다. 이 중 경기은행의 중소기업 대출금은 2조3천억원으로 전체 대출금의 74.5%를 차지했다. 당시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비율이 평균 48%를 유지했다.

   경기은행이 퇴출되고 10년이 흐른 지난 5월 18일 인천상공회의소는 '인천지역 경제현안 10대 과제'를 선정, 발표했다. 과제 선정에는 인천지역 345개 중소기업 경영자가 참여했다. 현안 과제는 올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선 후보자들이 공약으로 채택하도록 지난 9월 여야 각 당에 전달됐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바라는 지역경제인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한 현안 과제 중 '지방은행 설립을 위한 지원'은 8번째 과제로 목록에 올랐다. 경기은행 퇴출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지역 경제인들은 여전히 아쉬워하고 지방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인석 인천상의 부회장은 "오는 2009년 인천도시엑스포를 비롯 각 지방정부에서 개최하고 있는 국제행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가올 시대는 국가중심의 중앙집중화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방도시가 국가를 주도할 것"이라며 "이러한 의미에서 지방은행인 경기은행 설립에 헌신한 채호 전 인천상의 회장은 선각자"라고 평가했다.

   채 전 회장은 은행 문을 연지 불과 1개월여만에 세상을 떠났다. 1970년 1월 25일 오전 10시 인천 중구 송학동 구 인천상공회의소 회관 뒷마당에서는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됐다. 이날 장례식장엔 1천여명이 참석했다. 조문객으로 장례식장을 찾은 유승원 청와대 민정담당수석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해 고인에게 산업포장을 추서했다. 유 수석은 '나흘 전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대통령이 참석할 수 없어 애석해 하신다'는 말도 유족에게 전했다고 한다.

   현 두산그룹의 창업자이면서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박두병 전 회장과 남봉진 경기도지사, 유병태 인천시장은 조사를 낭독하며 고인이 가는 길을 기렸다. 박두병 전 회장은 조사에서 "모든 일에 정열을 쏟으시고 그 보람으로 인천수출산업공단의 오늘이 있게 되고 경인지구종합개발이 알차게 추진됐으며 인천은행과 기계공업공단의 빛나는 성장을 이룩했다"며 "입원 중 저를 볼 때마다 인천의 개발과 경기도의 개발을 걱정하시던 모든 일들은 이제 잊으시고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라고 애도했다. 영구차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인천 시내를 돌아 옥련동 선영으로 운구를 마쳤다.

   경기은행(구 인천은행)의 산파였던 채호 전 인천상의 회장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은행 설립과 동시에 간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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