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출발 합니다. 작가 선생."
나는 쑥스러워 남편의 눈을 외면한 채 쿡쿡 웃었다. 미서의 책 때문에 그리스에 일주일간 가야한다고 남편에게 알릴 때 사실 나는 약간 주눅이 들어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책이 아니라 미서의 유고집이었다. 게다가 여행의 목적은 유고집에 들어 갈 사진을 찍는 거였다.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순서를 정했기 때문에 이형수 혼자 가서 사진을 찍어 와도 무리가 없었다. 강민기는 내가 쓸 글을 염두에 두고 투자를 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파격적인 배려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남편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일 때문에 필요한 과정이라는 투로 말했다.
남편은 더 이상 회사를 나가지 않았다. 전반부 인생이 마침표를 찍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나의 변화를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양 쪽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자동차는 공항 고속도로를 달렸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면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달리는 것 같았다. 물이 빠진 갯벌에는 붉은 바다풀이 마치 물감을 뿌려놓은 듯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저만치 물러나 있는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햇빛이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바다 표면은 물고기의 등처럼 반짝거렸다. 바다위에 놓인 긴 다리를 달리자 자동차가 휘청거렸다. 남편은 속도를 줄였다. 자동차의 유리를 할퀴며 바닷바람이 아우성쳤다.
"바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데 차가 휘청대."
"다리가 높아서 그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다는 늘 바람이 불어."
남편은 운전대를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우리 인생 같구나."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남편은 그런 셈이지 라고 대꾸했다. 남편은 당분간 좀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남편의 일터가 생길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회사를 퇴직한 후 대뜸 미국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 것만도 내게는 다행이었다.
남편이 다시 일을 하려면 누군가 남편을 고용해야 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남편은 피고용자가 되어야 자신의 남은 생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자리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고 이런 현상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1968년에 자동현금 인출기가 개발 된 이래, 미국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은행 업무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의 절반 정도가 일자리를 잃었다. ATM 기계 한대가 무려 37명의 은행 출납계원 일을 한다. 게다가 기계는 병이 들지도 않는다. 기계의 발명은 모르긴 해도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보다 빠르게 사람들은 모든 분야에서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뺏길 것이다. 기계와 경쟁을 해서 이길 승산은 거의 없었다.
"기계가 못하는 일, 경쟁에 승리할 필요 없는 일이 뭔지 생각해 봐야겠어."
남편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매우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작권자 ⓒ 경인일보 (www.kyeongin.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