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원점독립캠페인 Ⅱ 지적(地籍) 재조사 해외현장을 가다·1]

일제 수탈지도 '대물림'

취재반 기자

발행일 2007-11-28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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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국민, 주권과 함께 국가의 3대 구성요소 중 하나다. 그만큼 토지정보를 담고 있는 지적도는 국가 행정의 핵심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낙후된 지적제도로 해마다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에 의해 1910년대에 도입된 지적제도를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경인일보는 과거 우리와 유사한 지적제도를 가지고 비슷한 문제점을 겪은 중국, 일본, 대만 등의 지적(재)조사 현황을 살펴보고, 우리나라 지적재조사 사업이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 지적제도를 도입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 작업에 나서면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대적 토지제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일본의 근대 지적은 일제(日帝)가 본격적인 제국주의 수탈에 나서면서 한국, 중국, 대만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실제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897년부터 수탈을 목적으로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대만에 자국의 지적제도를 이식했다.

우리나라의 지적 역사도 이와 유사하다. 애초 우리나라는 1907년부터 자체적으로 근대 지적제도 확립에 나섰지만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도쿄(東京)를 원점으로 하는 일제의 지적제도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후에도 승승장구를 거듭, 1920년대에는 마침내 중국 본토 일부에도 일본의 지적제도를 도입했다. 중국 공산화 이전의 만주, 다롄(大連) 등지에서 일본의 지적제도가 사용됐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약간의 시차를 두고 한·중·대만에 일본의 지적제도가 도입됐던 만큼 이들 4개국의 지적제도는 조직, 측량 단위, 측량 방법 등에서 유사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4개국의 지적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당시만 해도 최신식이었던 도해(圖解) 중심의 일본 지적도의 문제점이 불거지자 각국이 경쟁적으로 지적재조사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은 1951년부터 지적재조사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고, 대만도 1973년 지적재조사 사업에 나서 2005년도에 도시 전 지역의 지적을 새롭게 완성했다. 토지의 사유권을 금지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마저도 개혁·개방정책을 가속화시키면서 최근 각 성(省)별로 최신 지적도를 작성 중에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100여년 동안 몇 가지 미봉책을 제외하고는 낙후된 지적에 대해 어떠한 근본적인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 지적재조사 사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최소 4조~6조원으로 추산되는 사업비용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중국 다롄시 도시및국토연구센터 우장영(于長英) 위원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사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예산 때문에 지적제도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낙후된 지적제도는 시간이 갈수록 사회적 비용을 더 발생시키는 만큼 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한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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