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58>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03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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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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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수는 카메라를 메고 대형 트럭과 차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에 뛰어들었다. 레오니다스 왕의 청동상이 서 있는 반대편, 그러니까 고속도로 건너편이 전투가 벌어졌던 테르모필레 협곡이었다. 나는 이형수가 좌우를 살피다 달려오는 차들이 뜸한 틈을 타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보았다. 건널목 같은 건 없었고, 차들이 속력을 줄일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구간이었다. 관목 숲으로 싸여있는 낮은 동산이 깎아지른 절벽처럼 우뚝 솟아있는 산 아래 쪽으로 펼쳐져 있는 지형이었다. 고대의 치열한 전투를 떠올릴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형수가 무사히 도로를 건너오기를 기다렸다. 길 건너편 낮은 동산 사이에서 이형수가 보였다. 건너갈 때와 마찬가지로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차를 피해 그는 길을 건너왔다. 보고 있는 내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났다.

"별 것 없어요. 그냥 작은 길목이에요."

도로를 건너 온 이형수는 목에 건 카메라를 잡은 채 말했다.

"그래도 사진으로 보면 근사하죠. 세계적인 관광지 사진을 보고 현장을 답사하면 실망하듯이."

이형수는 차에 오르며 말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자동차는 고속도로에 진입했고 서서히 속력을 높였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세계를 직사각형의 파인더 속에 밀어 넣으며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뺄 것인가를 알게 모르게 정하게 돼요. 셔터를 끊는 그 순간에 눈에 들어 온 세상을 자신의 사유의 틀 속에 가두게 되고, 그게 사진의 숙명이죠."

"글도 그래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같지만 작가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주제나 표현방법, 느낌이 완전히 달라져요."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인을 모두 흑인으로 등장시켰더라고요.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남아프리카의 줄루족 추장 의상을 입은 거인으로 둔갑시켰고요.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페르시아를 아프리카 오지의 야만족으로 폄하했어요."

이형수의 말투는 내용과 달리 담담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인도 아리안으로 서구인이잖아요. 할리우드가 심하게 왜곡을 했군요. 이란에서 상영 금지된 게 당연하네요."

"누가 우리민족을 흑인으로, 우리문화와 전혀 상관없는 의상을 입은 민족으로 그린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

나는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작품의 재미를 위해 약간의 왜곡을 하는 것은 나도 가끔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역사물은 늘 창작과 사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마련인 장르였다.

"역사 깔고 뭉개기의 의도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영화 300에서 결사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용감한 미 해병대를 연상케 되어서 사실 좀 불쾌했어요."

이형수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영화가 독특하고 재미있었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게 문제죠."

"역사적 사실을 배제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사실을 정확히 인식한다는 게 그래서 중요한가 봐요."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이형수의 입장을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한국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리는 제 3국의 국민이기에 말이다. 만약 미국인이나 힘의 논리에 익숙한 서구인의 시각에서라면 영화 300이 매우 흥미롭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밟고 서 있는 장소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옮길 수 없는 무거운 발. 운명이란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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