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99]가수 박경원

한국전 폐허속 삶의 애환 '고스란히''인천의 노래' 가슴을 적시다

김영준 기자

발행일 2007-12-05 제0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인천 월미도 문화의거리 한 편에 서 있는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1999년 10월 9일 제막) 하단에 적힌 글(김윤식 작)은 50여 년 전 탄생한 이 노래를 이렇게 술회한다.

       
   "…100여 년 전 이 나라 최초 이민선의 노래 소리에 피눈물 뿌리던 곳이요, 8·15광복,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피붙이와 모질게 이별하던 마당이었으니 그 절절한 인간사는 두고라도 뜬구름, 푸른물, 해풍에 쓸리던 갈매기 하나인들 어찌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랴. 오늘, 비록 한 시절을 유행하다 사라진 노래이나 이 고장 인천항의 정한을 실어 세인이 부르던 곡 '이별의 인천항'을 이 비에 새겨 다시 한번 그때 그 시절의 인천을 추억해 본다."

   '이별의 인천항'(세고천 작사·전오승 작곡)은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인천 출신의 가수 박경원(1931.4.3~2007.5.31)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본다.

   
   당대 유행했던 곡들을 보면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삼각산 소식', '꿈에 본 내 고향' 등으로 피란민들이 잃어버린 가족과 등졌던 고향을 찾는 분위기를 그린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이별의 인천항'도 이들 노래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천의 사랑을 그린, 인천인의 노래 '이별의 인천항'이 태어난 것이다. 아울러 이 노래는 23세의 가수 박경원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박경원은 지금의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서 태어났다. 미곡상을 하던 부유한 집이었단다.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박경원은 넉넉한 가정 환경 속에서 가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시대 통념상 선친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박경원의 막내 동생 광원(64)씨는 "당시 예능인들을 딴따라라고 푸대접할 때였으니, 고지식하셨던 아버지의 반대가 상당히 심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형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셨어요. 어머니가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거나 한 건 아닌데, 형님이 큰 아들이었고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 몰래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아마도 당시 레코드라고 부르던 녹음기가 있었던 집은 인천에서 우리집이 유일할 거예요."

   박경원을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은 어머니란 게 동생 광원씨의 얘기다.

   또 고교시절 박경원을 곁에서 지켜본 이관섭(74) 인천실버그린악단 부단장은 "40년대 후반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2년 선배였던 박경원씨는 학교 다닐때 부터 노래 연습을 했었고, 인천상업밴드와도 함께 노래를 불렀다"면서 "전국 콩쿠르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하는 등 그때부터 가수로서의 끼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또 "당시 학창시절 함께 노래를 부른 이가 '눈물의 구포다리'로 유명한 원로가수 이갑돈씨였다"고 회상했다.

   박경원은 인천상업학교 시절 출전한 전국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작곡가 전오승(83·현재 미국 LA거주)의 눈에 띄게 된다. 전오승은 1953년 자신의 곡 '비애블루스'를 박경원에게 부르게 했고, 이를 통해 박경원은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김점도(74) KBS 가요무대 자문위원(인천실버그린악단 단장)은 "박경원씨와 전오승씨는 가수와 작곡자를 넘어서 인간적으로도 친해져 전씨가 인천을 자주 찾게 됐다"면서 "북한 진남포가 고향인 전오승씨는 인천 바다를 볼 때마다 고향 바다를 떠올리곤 했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이별의 인천항' 탄생 비화를 들려줬다. "54년 어느 날 두 사람은 월미도 앞 작약도에 바람을 쐬러 갔다고 해요. 그곳에서 박씨가 ''목포의 눈물'에 필적할 만한 인천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전씨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고, 이를 통해 그 해 '이별의 인천항'이 탄생하게 됐던 것이지요." 그는 "작사자 세고천은 전오승의 필명"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별의 인천항'은 전오승 작사·작곡인 것이다. 작사했다는 '세고천'이 누구일까 했던 궁금증이 여기서 풀렸다.

드   디어 인천에도 지역을 대표하는 노래가 탄생했다. 각 지역을 대표한다고 할 '서울의 찬가', '목포의 눈물', '돌아와요 부산항', '서산 갯마을'에 견줄만한 이 노래는 누구나 인천의 한 시대를 읊을 수 있도록 쉬운 가사와 멜로디로 만들어져 전국민에 의해 불렸다. 박경원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은 것이다. 한참 후인 1972년 인천문화상(연예 부문)을 그에게 안긴 곡이기도 하다.

   
  ▲ 충남 태안 만리포에 서 있는 '만리포사랑 노래비'옆에서 포즈를 취한 박경원.  
   
  ▲ 1999년 10월 9일 '이별의 인천항' 제막식 때 비석과 함께 한 박경원.  
   박경원의 노래 인생에서 또다른 영화를 준 노래인 '만리포 사랑'(반야월 작사·김교성 작곡)은 57년 발표된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로 시작하는 '만리포 사랑'은 박경원을 당시 국민가수급으로 올려놨다.

   "'이별의 인천항'과 곧이은 '만리포 사랑'으로 형님은 커다란 성공을 거뒀어요. 두 곡과 함께 지금도 사랑받는 노래 중 하나인 '남성넘버원'도 57년 발표돼 큰 인기를 누렸고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당시 형님의 속내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가정적인 면에선 낙제였던 것 같네요. 이혼 후 조카들은 둘다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동생 광원씨는 "형의 사생활을 정확히 모른다"면서 가정사에 대해 더이상 말하길 꺼렸다.

   50년대 후반 잇달아 히트곡을 낸 박경원의 생활은 향후 10년 정도 탄탄대로를 달렸다. 노래가 필요한 곳에선 모든 이들이 박경원을 부르려 했고, 그만큼 수입도 따랐다.

   하지만 유행음악의 특성상 10여년이 지나고 새로운 음악 소비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7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신세대들에게 그의 노래는 '흘러간 노래'였을 뿐이다.

   70년대 후반 인천연예협회를 이끌었으며 기타리스트로 박경원과 함께 무대에도 섰다는 윤일민(71)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의 나이트클럽으로 보면 되는데, 70년을 전후해 동인천에서 가장 유명했던 '장미회관'은 당대 최고 가수들이 출연했었어요. 박경원 선배도 종종 무대에 섰는데, 내가 회관 밴드의 악장으로서 박 선배의 노래에 대한 손님들의 반응을 보면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어요. 당시 밴드 악장인 내가 사회도 봤는데, '인천의 명물 가수'로 소개하면 손님들은 의아해 하는 눈빛을 보냈죠. 하지만 과거의 히트곡을 부르면 '아~'하는 인상이었어요. 당시 출연했던 김세라, 김상희, 남진 등의 인기에 비할 수 없었죠."

   하지만 박경원의 음악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서울과 인천에서 노래와 관련한 단체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모임은 물론 노래자랑 심사 자리에 참여하는 등 항상 후배들의 활동을 지켜봤다고 한다. 아울러 불우이웃 돕기 무대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인천에서 어떠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 시작 시간보다 몇 시간 일찍 와서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마치고 나서도 몇 시간 더 머물면서 술 한 잔 기울이면서 그간 못했던 대화를 나눴죠. 고향이어서 각별한 마음을 담고 있었던 같아요."

   윤 전 회장은 박경원의 맘에 담아 뒀던 '인천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박경원은 지난 200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 무대에 섰으며 올 초만해도 해외교포위문공연을 다녀오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나 당뇨 등 지병이 악화돼 입원 치료를 받다 결국 지난 5월 31일 숨을 거뒀다.

   50여 년 전 당대 지역민의 애환을 노래했으며, 이후에도 노래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박경원은 2000년 한국연예협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문광부장관표창을 받았다. 지난 6월 인천문화재단은 인천을 빛낸 '출향 문화예술인' 10인에 박경원의 이름을 첫 번째에 올렸다.

<김영준기자·kyj@kyeongin.com>

김영준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