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60>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05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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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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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떠있던 구름의 두께가 조금씩 두터워지더니 후드득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가늘었다. 안개비다. 가이드는 우리를 호텔 근처의 식당으로 데려갔다. 저녁으로 어린 양고기를 주문하고 이형수는 우조를 시켰다. 40도가 넘는 독한 술은 물을 타면 마치 우유처럼 뽀얀 빛깔이 된다. 나는 이형수가 건네 준 우조를 마시면서 비 오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40대로 보이는 가이드는 그리스에 온지 10년째라 했다.

"이곳은 일년 강우량이 우리나라의 3분의 1도 되지 않아요. 가을과 겨울에 집중적으로 내리지요. 하수도 시설이 빈약해서 어쩌다 시간 당 10밀리가 넘는 비라도 내리면 거리 곳곳이 빗물로 넘쳐흘러요. 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수난을 당하지요. 장마나 홍수도 없는 나라에 비 때문에 이재민이 생기는 때가 이 계절이죠."

지난 며칠 동안 가이드는 식사를 할 때 곁들이는 맥주 한 병 외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형수가 따라주는 우조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일할 때는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아요. 내일은 오전에 박물관을 둘러본 후 바로 로마행 비행기를 타면 돼요. 오전 중에 일정이 끝나니까 한잔 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덕분에 많은 곳을 둘러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우리는 유리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리스 시인, 엘리티스는 '비 한 방울에 여름은 죽고…' 라고 읊었어요. 9월까지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구어 한낮은 푹푹 찌듯이 뜨거워요. 그런데 10월에 들어서면 날씨가 갑자기 바뀌지요. 비와 함께 대지의 생명이 되돌아오듯, 누렇게 말랐던 풀숲 사이로 파릇한 새싹이 돋고 오렌지 나무에 열매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레몬 향기가 공중으로 은은히 퍼지죠."

가이드는 유창한 말솜씨로 그리스의 가을을 알려준다. 얼마나 많은 여행객들에게 그리스의 가을에 대해 이야기 했을까. 미서의 여행은 여름이었는데 지금은 겨울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형수는 아마 그런 것을 감안한 후에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빠르게 지나가 버린 일주일이 마치 한달도 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매 순간을 밟아서 다져넣듯 보낸 시간 탓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그냥 흘러 보낸 시간은 지루하지만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지만 밀도가 높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겨울에도 그다지 춥지 않아요. 기온이 늘 영상 10도 주변에서 오르내리죠. 하지만 음습해요. 습기를 머금은 추위가 소매 밑으로 기분 나쁘게 스며들죠. 좀 춥게 잠을 잔 날은 몸을 녹일 곳이 없어 움츠러드는 사지를 추스르기가 만만치 않아요. 감기라도 들면 낭패죠. 그럴 땐 고향의 온돌방이 정말 그리워져요."

가이드는 훌쩍 우조를 마셔버린다. 이형수는 가이드의 잔을 채워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하늘에 먹구름이 겹겹이 흘러간다. 가이드는 을씨년스러운 날씨라고 말하고 있다.

"단풍은 들지 않아요. 가을도 아주 짧고요."

종업원이 커다란 접시에 구운 양고기를 내왔다. 소금만 뿌려 구웠다는 어린 양고기는 부드러웠다. 고기를 먹다말고 이형수는 카메라를 꺼내들고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무엇을 찍어오려나? 너울대는 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는 고기, 혀끝에 감도는 맛을 찍을 수 있을까?음식 맛이 느껴지게 사진을 찍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수련을 거쳐야 가능할까. 이형수라면 맛이건 냄새건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형수는 프로 사진사가 아니라 작가였다. 예술가였다. 일주일 동안 이형수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치열하지도 진지하지도 못한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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