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62>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07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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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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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면세점은 우리 동네에 있는 할인 마트보다 작았다. 우조와 갓 수확한 올리브로 만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를 집어들었다. 음반 코너로 갔는데 그리스어를 읽을 수 없어 무엇을 사야할 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영어가 써있나 살펴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스 여가수 아그니 발차의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를 사고 싶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의 무덤이 발견된 베르기나로 가던 중 카테리니라는 도시를 지났다. 그곳이 바로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의 도시라고 가이드가 알려주었다. 카테리니 뒤로 멀리 보이는 산이 음악의 여신들인 무사이가 태어났다는 피에리아 산이라고 했다. 구불구불한 시골 국도를 달리면서 미서가 아그니 발차를 좋아했다는 생각이 났다.

옆에 서서 음반을 보고 있는 초로의 신사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영어라 해야 '익스큐즈 미'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수준일 뿐이었다. 나는 음반을 가리키며 천천히 '아그니 발차' 라고 발음했다. 남자의 머리칼은 은발이 섞여 희끗했고, 높이 솟아 곧게 뻗은 코와 검은 눈썹 때문에 아폴론 신상을 연상케 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면서도 남자는 미소를 띤 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다.

"아그니 발차, 카테리니."

나는 그 두 단어를 되풀이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 남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발음할까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를 그리스 말로 가이드에게 적어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천천히 말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약간씩 억양이나 악센트를 바꾸어 보았지만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발의 남자는 극동에서 온 작은 여자의 소원을 들어 줄 의무라도 짊어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 친절한 그리스 남자를 실망시키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아그니 발차 노래의 첫 소절을 허밍으로 조그맣게 불렀다. 남자는 조용히 내게 귀를 갖다댔다. 면세점 안은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부산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주고받는 말소리, 몸이 부딪치고 스치면서 모든 것이 출렁거렸다.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문득 그리스에서 8시에 떠난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 관공서와 가게가 문을 닫고 거리의 불빛도 잦아들고 도심은 텅 빈다. 여간해서 식을 것 같지 않던 대지가 차가워지고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시간이다. 가족이 있는 도시로 떠나는 기차. 아쉬움과 그리움이 서늘한 공기 속을 떠돌고, 뱀처럼 휘어진 철로를 따라 점점 작아지는 기차를 바라보는 쓸쓸한 여자. 그런 장면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남자는 가득 꽂혀있는 진열대에서 음반 하나를 뽑아들었다. 아그니 발차였다. '에프하리스또', 친절한 남자가 못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다시 한 번 '에프하리스또'라고 말했다. 남자는 마치 프라이팬에서 팝콘이 튀는 것 같은 억양으로 무슨 말을 했고 나는 영문을 모르는 채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손끝으로 음반을 훑어가다가 머리 위쪽의 높은 진열대에서 음반을 하나 빼냈다. 읽을 수도 뜻을 파악할 수도 없는 그리스어 일색이었다. 면세가로 18유로라는 것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전부였다. 태양신 아폴론을 상징하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민속음악이나 그리스적 색깔이 짙은 음악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내민 음반을 받아들었다. 남자는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여행이길 바란다. 그리스는 어땠느냐? 이 음반을 들으며 그리스에서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려라. 뭐 그런 말이 아니었을까. 계산을 마치고 돌아보았더니 은발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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