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64>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11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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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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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다른 것으로 태어나기 위한 시작의 단계일 수도 있었다. 꽃으로 나무로 흙으로, 다른 인간의 살로 머리칼로 그러니 애통해 할 것도 없었다. 어째서 살붙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픈지 알 수 없다. 인연이 다해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일까. 곁에 있을 때 미워하고 사랑했던 기억때문인가. 연탄불에서 간간이 연기가 피어올랐다. 눈이 매워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면장갑으로 얼른 두 눈을 문질렀다. 남편이 화로의 바람구멍을 조금 줄였다.

"운전은 내가 할게."

나는 남편의 앞에 놓인 잔에 가득 소주를 채웠다. 남편은 조금 망설이다가 술잔을 들었다. 달게 넘어가는 술이 수척해진 남편의 목울대를 움직였다. 남편의 드문드문 드러나는 흰머리칼과 여윈 뺨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과 코, 입과 전체적인 모습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했다. 이마에서 쭉 내려온 남편의 코가 생각보다 날카로웠고, 잔에 맞닿는 입술과 쌍꺼풀 없이 큰 두 눈도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남편이라고 생각한, 내가 파인더에 밀어 넣어 찍은 사진을 보았던 것일까 생각했다. 남편의 기다란 손가락과 시들어가는 피부를 쓸어보고 싶었다. 이전에는 없었던 감정이 잔잔한 물처럼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따스하게 가슴을 적시며 흐르는 감정 속에 사랑이라고 뭉뚱그려지는 애정, 연민, 배려, 관용 등과 같은 것들이 들어있는 것일까.

"나도 한 잔 하면 안 될까? 딱 한 잔만."

애절한 목소리를 내면서 남편의 얼굴 앞에 빈 소주잔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남편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못본 척 외면했다.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나는 올려든 빈 잔을 조금 흔들었다. 남편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기가 퍼졌다. 저렇게 남편의 웃는 모습이 얼마만인지 알 수 없었다.

"소주 두 잔 정도는 음주 측정에 무사통과라는데."

내 말에 남편은 못이기는 척 술을 따라주며 중얼거렸다.

"못 가면 여기서 자고 가자."

"그럼 되겠네. 당신은 역시 머리가 좋아."

내가 너스레를 떨자 남편은 소리내어 웃었다.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남편은 친구의 회사에 나갈까하고 말했다.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이 여의도에 있는 한 자산회사의 대표이사로 있다고 했다.

"재취업하기 힘들잖아. 오라고 할때 나가. 당신 능력 출중하겠다 뭐가 걱정이야."

"다른 것도 좀 알아볼까 해서."

"동창이 사장이라 자존심 상해서 그래?"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다니던 직장에서 떠밀려 나온 충격이 채 정리가 안되었을 수도 있었다.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은 어쨌든 스트레스다. 게다가 남편은 형제 중 막내라 미국에 있는 누이가 그리울 수도 있었다. 미국의 누이는 남편에게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니 여러가지 가능성 중에 미국행이 들어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직장이 생긴다면 마지막 보루는 마지막으로 밀려날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모든 것이 명쾌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이 여행의 효과일까. 나는 이미 음주운전의 수준을 지나버린 양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바닷가 식당의 유리창 너머로 수평선에 걸린 겨울해가 보였다. 주홍색으로 물든 구름이 넓은 하늘 이곳저곳 퍼져 있었다.

"그동안 비 오고 날씨가 흐렸는데 당신이 오는 날 맑게 개였어."

"내가 돌아와 기쁘다고 왜 직접 말 못해?"

술 취한척 던진 내 말에 남편은 빙긋 웃었다. 술때문에 달아오른 웃는 얼굴이 석양빛을 받아 더욱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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