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100]영문학자 오화섭

우리말로 재탄생한 '美 현대극''제2의 창작'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07-12-12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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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남동면 만수리에서 태어난 영문학자 오화섭(吳華燮·1916~79)은 미국 현대극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해 알린 선구자다.

   그가 번역한 미국 번역작품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비롯해 손튼 와일더의 '우리읍내', 테네시 윌리암스의 '유리동물원'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아서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등으로 지금까지도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당시 연극인, 영문학자들은 오화섭의 번역을 두고 '번역을 창작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평가(조선일보 1973년 10월 25일자 5면)를 했다.

   1960년대 오화섭과 함께 연극평론계의 '쌍두마차'로 불린 여석기(84)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은 지난 2005년 유영국미술문화재단과 실시한 인터뷰에서 오 교수를 '번역의 1인자'라고 표현했다.

   "62년에 드라마센터의 2회 공연으로 '밤으로의 긴 여로'라고 있어. 오닐의 맨 마지막 작품. 그건 참 좋은 작품입니다. 그 오화섭씨가 번역을 했는데, 오 선생이 미국의 현대연극을 번역하는 제1인자고, 참 부드럽게 번역을 잘해요."

   
  ▲ 연극관련방송토론 : 방송토론에 참가한 오화섭(가운데), 왼쪽에서 두번째는 배우 황정순.  
   한상철 한림대학교 교수는 1989년 열린 '오화섭교수 10주기 추모 연세극예술연구회 공연'에 앞서 발표한 <오화섭 교수의 문학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나라 서민의 일상적인 대화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분이다…(중략)…무대에서 배우가 그 대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으면 번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중략)…짤막한 문장 길이, 적절한 어휘의 구사, 다양하고 자연스런 어미의 활용, 우리말의 리듬과 억양을 그대로 살려가는 게 오화섭 교수 번역희곡의 특징이요, 장점이다."

   오화섭은 해방 이후부터 극단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을 하며 번역 대본을 무대에 올리는 데 힘썼다.

   일본 유학시절 만나 결혼한, 4살 연상의 첫 번째 부인 박노경(朴魯慶)은 극단 '여인소극장'을 창단(1948년)한 한국 최초의 여류 연출가다. 당시 오화섭은 '吳說'이란 필명으로 번역한 대본을 여인소극장에 제공하고, 연극비용 조달 등 각종 뒷바라지를 도맡았다고 전해진다. 박노경은 1950년 9·28수복 당시 서울 북아현동 집 부근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이후 극단 '떼아뜨르 리브르'(1953년), '연희극예술연구회'(1953년), 극단 '산하(山河)' (1963년) 등에서는 창립 작업을 함께 했다.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1963~65년), 한국셰익스피어협회 이사(1963~79년) 등을 지내며 학술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화섭은 음악에 조예가 상당했고, 각종 매체에 음악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래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29년)하고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한 오화섭은 당시 학교 음악선생에게 클라리넷을 처음 배웠고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 유학시절(1935~40년)에는 대학 오케스트라단에서 활동했다.

   1946년에는 작곡가 현제명이 주도해 만든 고려교향악단 창단멤버로 활동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오화섭은 1950~60년대 신문에 연주회, 오페라 공연 편을 연재하기도 했다.

   오화섭은 옛 경기도 부천군 남동면 만수리(현 인천 만수동) 담배고개 옆 구석마을(구석말)에서 태어났다.

   부친 오혁근(吳赫根)은 남동면장, 1대 인천시의회 의원(징계자격위원장)을 지낸 '동네 어른'이었다. 당시 동네사람들은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을 때마다 '오 면장'을 찾았다고 한다. 오혁근은 자녀들을 엄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피란시절 인천에서 잠시 머문 경험이 있는 오화섭의 딸 오혜령(65)씨는 할아버지를 "위엄이 가득하고 강직한 한학자"로 기억했다.

   오화섭은 부친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말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우리 영감(오화섭)은 일본 유학시절 한 달에 2~3번씩 아버님께 문안편지를 보내야 했어요. 집안이 엄격했거든요. 아버님은 방학을 맞아 집에 온 아들을 앞에 앉히고, 빨간줄이 그어진 편지를 보여주셨대요. 아버님은 아들에게 '문장이 이상하다' '단어 사용에 문제가 있다' '어른에게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유학시절 문안편지를 쓰는 일이 참 어려웠다고 하시더라구요."

   연세대학교에서 오화섭과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나 결혼(1958년)한 김형순씨는 이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준 뒤, 오화섭은 평상시에도 우리말 사용에 굉장히 예민했다고 말했다.

   "집에 와 뉴스 보면서도 앉아서 아나운서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했어요. '낱말의 고저(高低), 장단(長短)이 틀렸다, 발음이 잘못됐다'는 식이었죠. 영감은 대본을 읽을 때 리듬을 중요시했어요. 이 같은 습성이 번역물에 그대로 나타났죠."

    
  ▲ 1960년 서울지검장 검사로부터 국가보안법 구형 :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심 재판중인 오화섭(오른쪽), 왼쪽은 매부 정연철.  
   1960년 10월 14일 밤. 서울 신촌 연대 교수사택에 오화섭 친동생의 남편으로 한국전쟁 때 월북한, 대남간첩 정연철(鄭演徹)이 찾아오면서 오화섭의 삶에 '그늘'이 드리워진다.

   오화섭은 월북 후 10여년 만에 찾아온 매부를 집에 들이지 않고 내쫓았지만, 같은 해 10월 27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 사건은 개정 국가보안법 9조 '불고지죄' 혐의로 구속기소된 첫 사례가 됐다.

   오화섭은 "매부를 재워주면 은닉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까지 죄가 되는 줄은 몰랐다"고 했지만 법원은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신국가보안법 9조에 규정된 불고지죄는 그 입법취지가 엄격한 처벌규정이라고 보기가 어렵고 우리 국민의 풍속상 친척을 재워주는 일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서울고법의 판결을 뒤집고 유죄를 결정했다.

   김형순씨는 "이 일을 겪고 영감은 대학을 잠시 떠났고, 시골에 계신 아버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해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화섭은 여전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버님은 성격이 아주 명랑하시고 의지적이고, 해학이 대단하셨어요. 주변 사람들이 항상 배꼽을 잡고 웃었으니까요. 아버지는 대학에 다니는 딸과 같이 춤을 추고, 볼에다 입을 맞춰 주셨어요."

   오화섭은 위암수술을 한 뒤 숙환으로 고생하다 1979년 5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는 평소 지인들에게 "평론은 아무리 잘해도 비판을 하면 당사자에게 욕을 먹는다. 정년이 지나면 단편소설을 쓰겠다"고 했지만, 정년을 1년 앞두고 생을 마감했다.

   오화섭의 번역본은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중에 팔리고 있다. 일부 번역가들은 이 번역본을 그대로 베끼다시피해 발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오화섭의 번역본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지난 2003년 영문학관련 한 학회는 "원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고 한 노력이 엿보이고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는 편이지만 일부 오역을 발견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형순씨는 "나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고 운을 뗀 뒤 말을 이었다. "(오화섭은) 음악을 한 분이에요. 우선 배우들이 대사를 칠 때 리듬을 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극 대본에 쓰기 위한 번역을 하셨고, 전체적인 맥락을 중요시했어요. 흐름에 방해가 안 되고, 감동을 주면 그만이었죠. 한 글자씩 떼 보고, 따져보면 틀린 게 있겠죠."

<김명래기자·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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