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65>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12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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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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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끝나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미서의 여행기는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었다. 나는 강민기의 권유대로 만화스토리를 쓰기로 했다. 미서가 남긴 엽서와 메모와 자료를 들춰보면서 스토리를 어떻게 짤 것인지를 궁리했다. 책장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다 미서에게 빌렸던 사전을 발견했다. 손끝으로 가만히 사전을 문질러보았다. 누구에게 돌려줘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그리스에서 산 두장의 시디를 사전 옆에 같이 꽂아두었다. 누구에게 어떻게 돌려 줄 것인지는 일을 끝내고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책상에 앉아 빈 종이에 스토리의 얼개를 대강 그려보았다. 등장인물과 주인공의 목표를 정하면 반은 쓴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백지위에 그림을 그렸고 글자를 끼적거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머리 속에는 주인공 외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백지 위에는 뜻을 알 수 없는 의미 없는 글자만 씌어 있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온 신경이 스토리를 위해 모여들어 전력투구를 해야 하는데 산산이 흩어져 허공을 부유했다.

정오가 지났으니 점심을 준비해야 했다. 남편은 친구 회사에 간다고도 가지 않겠다고도 확답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따금 시내에 면접을 보거나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냈다. 남편이 결정하기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생각했다. 쓸데없는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았다.

보던 책과 자료를 덮어두고 방을 나갔다. 토스트와 계란과 커피로 간단히 먹은 아침을 보충하기 위해서 점심을 준비하는 시간은 다소 길었고 번거로웠다. 도마 위에서 단칼에 잘라지는 두부나 양파처럼 겨우 가는 실처럼 이어놓은 스토리 라인이 가차 없이 잘려나갔다. 찌개가 끓는 동안 주인공과 인물들을 둘러싼 사건이 형체도 불분명하게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글을 쓰는 시간은 짬짬이 건너뛰는 자투리 시간이 아무리 많아야 소용없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조용히 발효되는 술처럼 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남편에게 텔레비전을 켜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소리를 아무리 죽인다 해도 신경이란 놈은 묘하게도 전자파의 충격을 감지했다. 공중을 퍼져나가는 전자파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건 교란시켰다.

나는 서서히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큰 방해꾼은 남편이었다. 작업공간에 나와 다른 주파수를 가진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남편의 움직임을 주시했고 지극히 작은 소음도 포착했다.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양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이러다가는 남편을 묶어 쓰레기 수거함에 집어 던질지도 모른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남편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남편이 식탁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물었다.

"커피 줄까?"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로 가 아침에 다 본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질끈 눈을 감는 심정으로 말했다.

"집에 있으니 일이 잘 안돼. 작업실 빌려서 그곳에서 일했으면 해."

남편은 신문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난 번 전시회하던 장소 말이야. 늘 비어있으니 아무 때나 필요하면 사용해도 좋다고 그랬어."

"어디라 그랬어?"

"아. 당신은 전시회에 오지 않았지? 시내야. 산 아래, 미술관이 있는 동네야."

그곳에 이형수의 작업실도 함께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길어야 한 달 남짓 사용할 터였다. 쓸데없는 오해는 사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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