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68>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17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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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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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의 빈 방에서 처음 한 일은 책상을 만드는 거였다. 중앙 홀과 다른 방을 뒤져 책상으로 쓸 적당한 테이블을 찾아냈다. 노트북을 얹고 참고로 볼 책이나 다른 자료를 둘 만큼 넉넉한 크기였다. 탁자를 내 방으로 옮겼다. 다리가 상하거나 부러지지 않게 조금씩 탁자를 바닥에 끌어 당겼다. 창 곁에 탁자와 의자를 놓고 노트북을 올렸다. 가지고 온 책을 꺼내 한 쪽 구석에 쌓았다. 먼지를 닦아내고 대걸레로 바닥을 밀었다. 자줏빛 우단으로 된 커튼만 아니라면 그럴듯한 작업실로 보였다. 주방에서 커피를 끓여 와 창을 마주 보고 앉았다.

창을 통해 길게 들어오는 겨울 햇살, 미술관의 돌담과 가는 붓으로 터치를 한 듯 수없이 중첩되어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들, 기하학적으로 어긋난 직선을 연상하게 하는 미술관의 지붕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연두 빛 마을버스가 느리게 지나갔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친밀감이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며 나는 햇살이 사선으로 떨어지는 탁자 위에 손을 내밀었다. 햇살은 조금씩 길어지면서 창에서 물러났다. 잔에 남은 커피를 마시다 조금 놀랐다. 어느 새 커피가 싸늘하게 식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노트북의 전원도 넣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시간이 지나간 것이었다.

아주 잠깐, 나는 자유의 꼬리를 슬쩍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이 당황스러웠다. 집에서도 혼자되어 글을 쓸 때가 있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나면 오롯이 나 혼자만 남았다. 하지만 중국집 창가에 앉아 있는 지금의 느낌은 그것과는 달랐다. 온통 나 자신의 것, 완벽하게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진 것 같았다. 조금은 고독했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기이한 감정에 다소 얼떨떨했다. 무어랄까, 남편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섹스를 하는 내가 마치 빈 껍질처럼 여겨졌다. 이곳에 앉아 차츰 기울어지는 햇살 때문에 추위를 느끼는 내가 진짜 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진짜인 나는 언제까지나 여기 이렇게 있고 가짜인 내가 집으로 돌아가 청소를 하고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일을 처리하고, 남편과 함께 앉아 일상을 나눌 것 같았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얼른 노트북을 켰다. 그동안 짜놓았던 이야기의 얼개를 화면에 띄웠다. 남편과 공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게 여겨지는 죄의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노트북에 코를 박았다.

빈 종이에 스토리를 그려 넣었다. 주제로 이르는 무수히 많은 길이 그어졌고, 길 위에서 나그네를 방해하는 괴물과 갈등 요소가 검은 사인펜으로 그려졌다. 주인공이 도달해야 하는 높은 곳, 혹은 한없이 낮은 곳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것만 명쾌하게 알 수 있다면 내 글은 최소한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검정 사인펜으로 제 2갈등이 끝나는 지점에 두 번째 갈등이 나타나고 그 갈등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갈등이 등장하는 스토리를 스케치했다. 만화스토리는 최소한의 얼개와 등장인물과 각 인물들의 목표정도는 그려놓고 시작을 해야 중간에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빠지지 않는다.

에이포 용지에 대강의 스토리가 드러났다. 나는 스카치테이프로 열장에 이르는 종이를 나란히 중국집 유리창에 붙였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고치고 재구성을 해야 한다. 스토리가 변하면 그때마다 거기에 해당되는 종이는 떼어 내고 새로운 이야기로 짠 개요를 대신 붙이면 된다. 중국집 유리창에는 하얀 종이가 아래 위 두 줄로 나란히 붙었다. 그제야 나는 사방이 깜깜해진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서의 내 첫 작업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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