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71>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20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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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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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스토리를 밀어내면서 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스 여행에서 돌아본 산천의 풍경과 유적,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물품과 의복같은 것들이 상상력을 끌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작업실에는 전화나 인터넷이 되지 않아서 강민기나 정신희의 반응을 알 수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믿고 나는 내 방식대로 스토리를 써나갔다. 만화 스토리의 전체 분량 중 이미 절반가량을 넘기고 있었다.

중국집 창을 통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다가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들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아침에 집을 나와 밤늦게 돌아가면 나는 주방에 붙어 서서 몇가지 반찬을 만들었다. 피곤하고 바빠도 반찬을 만들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을 플라스틱 그릇에 넣어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이어주는 최소한의 끈이었다. 남편은 인내심을 가지고 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스토리는 다 짜여있어. 쓰기만 하면 돼. 길면 한 달, 빨리 쓰면 그 전에라도 끝나."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시간은 바람처럼 왔다가 재차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뒤섞이는가 하면 어느 순간 도로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작업실에서 내가 만든 인물들과 놀 생각을 하면 온 몸이 근질거렸다. 현실을 떠나있는 그 시간이 내게는 가장 현실 같았다. 언 손을 가끔 엉덩이 아래에 넣고 어깨에 걸친 두꺼운 모직 숄의 온기를 턱으로 문질렀다. 해가 좋은 날은 중국집의 넓은 창을 통해 옅은 황금색 볕이 폭포수처럼 책상위로 쏟아졌다. 빛의 입자는 방의 구석구석을 채우며 온기를 피워 올렸다. 가끔은 창을 조금 열어 환기를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한 때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 앉아 식사를 했을 둥근 탁자를 두고 집으로 가기 위해 일어나는 것은 몹시 서운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탁자를 쓰다듬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정인을 보내는 것처럼 손끝에는 슬픔이 고였다.

남편의 곁에 누워 눈을 감으면 중국집에 두고 온 신화가 어른거렸다. 내 영혼은 중국집에 두고 허물 벗은 매미처럼 빈 껍질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여사제가 된 나는 신탁을 받기위해 몽롱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신전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집으로 스며들었다가 소리없이 빠져나왔다. 작업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끝나기를 원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두려웠다. 남편과 이룬 십년의 세월이 내가 발을 빼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온전할까. 그렇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발을 빼고 싶은 강열한 유혹이 엄습해 왔다. 그럴 때 나는 꽁꽁 언 손으로 양 볼을 감쌌다. 얼굴을 통해 전해지는 냉기가 두개골을 자극하면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작업이 얼른 끝나기를, 따뜻한 아파트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내가 만든 세상이 책 속에서 완성되는 날, 환상이 사그라질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밀려왔다 가버리는 파도처럼 글을 쓰는 일은 때로 열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기간도 필요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스토리를 붙들고 미적거렸다. 대단원의 결말을 보내지 않고 하루동안 품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진눈깨비가 비처럼 쏟아지던 저녁이었다. 앞의 책들은 이미 인쇄에 들어간 상태라고 정신희가 이메일로 전해주었다. 봄에는 10권 모두가 서점에 깔릴 예정이었다. 반응이 어떨 것 같으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글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반응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겨울동안 나는 처음 내 삶을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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