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72>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21 제0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358846_57903_101
아침부터 굵은 눈송이가 쏟아지던 날, 강민기가 전화를 했다.

"재판 들어갔다. 선영아, 축하한다."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 끝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탈진한 듯 몇 날 며칠 잠을 자고 난 후처럼 멍해 있던 날들이었다. 수화기를 들고 나는 베란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전화기 저편의 강민기는 벌써 사라졌는데 나는 여전히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남편은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다. 친구의 회사에 나가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진행중이 될지도 몰랐다. 남편은 거의 외출도 않고 종일 인터넷에 매달려 있었다. 남편도 비워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평생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지탱해주기 위해 애쓴 날들이었다. 자발적이라 해도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화기를 놓고 남편에게 갔다.

"책이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재판 들어갔대. 당신 매니저로 고용해도 되겠어."

나는 남편의 뒤쪽에서 어깨를 팔로 안았다. 남편은 말없이 한 손을 올려 내 손을 잠깐 잡아주었다. 그 손길은 '방해하지 말아 줘'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남편의 어깨에서 손을 풀어내고 방을 나왔다. 등 뒤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조그마한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강민기는 출판사로 오라고 말했다. 나는 눈 내리는 정원을 내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전병헌이 아직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봄에는 전량을 서점에 내기 위해서 잠시도 쉴 틈이 없을 것이다. 전병헌이 작업을 끝내면 함께 보도록 해요. 내 말에 강민기는 좋아, 유쾌하게 대답했다.

고속도로가 두절됐고, 산간의 도로가 끊겼다. 텔레비전의 뉴스는 온통 눈에 대한 것 뿐이었다. 미끄러져 앞차와 부딪쳐 찌그러진 승용차와 고속도로에서 뒤집힌 대형트럭 뒤로 줄줄이 일어 난 추돌사고, 죽은 사람들과 다친 사람들.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위에 피로 얼룩진 대형 사고들이 화면을 채우고 또 채웠다. 남편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않고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다. 말도 없었고 저녁 식사도 거른 채였다.

뉴스가 끝나고 밤이 늦었는데 남편은 꼼짝도 않았다. 책을 읽다가 시계를 올려보았다. 자정이 가까워졌다. 눈 쌓인 풍경이 좋아서 커튼을 걷었다. 하얀 눈이 반사한 빛 때문에 밖은 백야처럼 훤했다. 나무와 건물 지붕이 부드러운 선으로 변했다. 남편의 마음에도 수북이 눈이 내렸으면 싶었다. 남편을 방해하지 말고 안방으로 들어갈까 망설였다. 마음이 편치 않을 때는 내버려두는 것도 필요했다. 하지만 한 공간에서 무심한 척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남편이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일어나 몇 번 목청을 가다듬었다. 방문을 열고 문턱에 서서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척을 냈는데도 남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남편의 어깨 너머로 컴퓨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화면을 보고 놀란 것과 동시에 남편은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

남편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조금 사이를 두고 현관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문이 부서지는 것처럼 큰 소리가 났고, 아파트 벽체가 부르르 떨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머리 속이 헝클어진 전선뭉치가 되어 정지해 버렸다.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나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몸을 내렸다. 화면에는 가을 전시에 출품했던 내 작품이 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었나?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나' 이었던가? 지금은 제목도 얼른 기억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경인일보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