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74>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25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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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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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빈 캔을 손아귀에 넣고 움켜잡았다. 남편은 쓰레기통에 찌그러진 맥주 캔을 던져 넣었다. 나는 캔 맥주와 조미된 오징어를 샀다. 종업원이 건네주는 비닐봉지를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눈길을 걷는 동안 남편의 침묵이 바위처럼 나를 눌렀다.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는 눈길을 거슬러 걸어 집으로 갔다. 나는 슬그머니 남편의 외투 주머니에 내 손을 집어넣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납으로 만든 추가 가슴 한 복판에 무겁게 드리워졌다. 남편은 내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는 남편의 손은 나무토막 같았다. 남편이 내 손을 뿌리쳐주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나는 신발의 눈을 터는 척하며 남편의 외투 주머니에서 슬며시 손을 빼냈다. 꽉 막혔던 숨통이 터지는 듯 나는 천천히 숨을 내 쉬었다.

유리잔을 꺼내고 조미된 오징어를 사기 접시위에 가지런히 찢어 놓았다. 남편은 그런 나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남편은 석고로 만든 가면이라도 쓴 것 같았다.

두 개째의 캔을 비울 때까지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찍게 된 동기와 정황을 설명했다. 길지 않은 내 말이 끝났을 때 남편이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듯 내게 물었다.

"작업실을 빌려주고 그리스에 함께 갔고 작품 사진을 찍은 것이 모두 이형수?"

이형수와는 그냥 일을 함께 한 사이일 뿐이라고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남편의 눈에는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고통이 담겨있었다. 남편은 허공을 보았다. 남편의 심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왜 변명도 하지 않지?"

남편은 거칠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게 말하려고 나는 안간힘을 썼다. 몇 번이나 입술을 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일본에 있을 때 나는 절망에 빠졌던 적이 있었어."

남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할 때, 나는 금방 알 수 있었어. 당신이 그때처럼 생기에 차고 건강해 보인 적이 없었거든. 그 여자를 만나고부터 당신은 바다에서 펄떡이며 뛰어오르는 생선 같았어."

금속처럼 차갑게 빛나던 남편의 눈빛이 한 순간 꺾여 안개가 낀 듯 흐려졌다.

"그때 나는……. 나는 말이야……."

남편은 더듬으며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을 죽이고 그 여자도 죽여 버리고 싶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어떻게 해야 당신들을 죽일 수 있는지를 몰랐거든. 그래서 나를 죽였어. 그게 당신들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쉬웠거든."

몹시 목이 말랐다. 잔을 들어 가득 차 있는 맥주를 끝까지 다 마셨다.

"내 속에는 상처입고 버림받아 망신창이가 된 작은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작은 애가 이제 성인이 되었어. 당신을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아니,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 모르겠어." 남편은 의혹에 찬 눈으로 다그치듯 쏘아보았다. 단숨에 마셔버리고, 탁자 위에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는 것처럼 한 순간 나 자신을 내려놓았다. 텅 빈 잔처럼 잠시 시간이 멈췄다.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야."

남편은 벼락에라도 맞은 듯 두 눈을 감아버렸다.

"이 형수. 그 사람은 아니야."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말했다. 남편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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