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끝]에필로그

희미한 흔적들… 100人의 '역사'를 만나다

정진오 기자

발행일 2007-12-26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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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인물 100인'을 찾아 나선 지 3년이 넘어서야 그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2년을 예상했는데, 1년이나 더 끈 셈이다.

   인천항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고 근·현대 시기에 이르기 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100명의 인물을 선정했다. 그러나 100명의 '인천 인물'을 선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강화를 낀 인천은 선사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유물과 역사적 인물을 배출했지만, 이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특히 근·현대 시기의 인물사 연구는 '백지 상태'나 다름없다. 그것은 아마도 해방공간이나 6·25 전쟁 직후 좌·우 갈등이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탓에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거나 '기념'하려 하지 않았던 풍토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이름 석자나 짧은 인물 설명만을 갖고 무작정 취재에 나서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연결고리를 찾지 못해 중간에 포기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시리즈 연재 기간이 길어진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매주 한 차례씩 싣기로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다보니 독자들의 불평도 있었다. "한 차례도 빠뜨리지 않고 인천인물 기사를 모으는데, 기사 게재가 들쭉날쭉해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 괜한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독자에겐 빠뜨렸다는 지난 신문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서울의 한 대학생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다른 것이 신문에 실렸는데, 어떤 게 맞냐는 식이었다. 연구자마다 시각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어서 생긴 일이었다. 그 학생에겐 취재원이었던 연구자를 연결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인천 인물 100인' 시리즈가 나가는 동안 지역의 반응도 뜨거웠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해주는 점에 고맙게 여긴다는 격려와 함께 누구 누구는 인천을 대표할 만한 사람인데 왜 아직 보도하지 않느냐는 식의 '제보성' 얘기도 있었다. 일반 독자 중엔 "그렇게 훌륭한 분이 인천에서 활동했는지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하는 이도 많았다. 이런 저런 반응은 취재기자들에겐 좀 더 세세한 부분까지 독자에게 알려야겠다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지역의 몇몇 '향토사' 연구자들이 3년이 넘는 이 '대장정'에 함께 하며 큰 힘이 됐다. 또한 '인천 인물' 기사는 지역 연구자들에게 풀어야 할 '숙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친일전력을 가진 인물이나, 건국 이후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사람, 자진 월북한 인사들을 '꼭 인천 인물에 포함시켜야 하느냐'는 불만도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직도 서로에게 쌓인 게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인물' 시리즈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나 기록을 찾아 낸 일도 여럿 있었다.

   특히 2006년 2월 16일자에 보도된 '우문국 화백' 취재에서 시작된 '실미도 난동자와의 동승기' 최초 공개는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고 자평할 수 있다.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 사건 현장에 있던 우문국 화백이 당국의 발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적은 기록이 경인일보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 서른의 나이에 월북해 북한 미술계를 이끈 조각가 조규봉을 다루면서는 '인천이 낳았으나 인천이 잊어버린 비운의 예술혼'이라고 얘기(2006년 4월 6일자 14면 보도)했는데, 조규봉은 정작 북쪽에서도 잊혀진 존재였다는 사실을 추후에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가 올 봄 취재 차 평양을 방문한 길에 북측 안내원에게 조규봉에 대해 물으니, 도무지 모르는 인물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북쪽 땅 대부분의 김일성 동상을 제작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지금에 와서 까맣게 잊혀진 이유를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되돌아 보면 부끄러운 구석이 많다.

   "가장 역동적인 인천시대를 열었지만 잊혀지거나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인천 인물'을 온전히 찾아 새 역사의 씨줄과 날줄로 삼으려 한다"는 애초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에서다. 시작은 거창했지만 그 알맹이를 내놓지 못했다는 자괴감인 것이다. 3년을 넘게 진행해 온 이 시리즈가 '인천 역사 찾기'란 긴 여정에 작은 계단 하나를 올렸다고 여긴다면 지나친 위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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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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