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75>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26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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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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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탁자 위로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움켜잡았다. 빈 캔과 잔이 식탁에서 떨어졌다. 유리잔이 깨졌고 맥주 캔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순식간이었으므로 저항할 새도 없이 나는 남편의 손에 목을 내맡겼다. 깊은 물 속에 잠긴 듯 숨이 가빠왔다. 온 몸의 피가 얼굴로 쏠렸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운 남편은 양 팔에 자신의 전 체중을 실었다. 어느 순간, 눈이 앞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에서 폭이 넓은 허연 광목천이 펄럭거렸다. 작은 불티가 사방으로 튀어 올라 하얀 천에 옮겨 확 불이 붙었다.

나도 모르게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 깜짝 놀란 남편이 내 목을 놓았을 때 기침이 튀어나왔다.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져 오래 기침을 했다. 남편은 늘어진 내 몸을 들어올려 흔들며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복수하는 거야?"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기침이 멈추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힘겹게 손을 들어 내저었다. 남편의 얼굴이 내 코앞에 있었다. 남편의 눈 속에서 겁에 질린 작은 소년을 본 것 같았다. 상처입고 버림받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는 약한 아이.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남편을 안아주고 싶었다. 위로해주고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내가 저지른 일이 살해당한 짐승의 내장처럼 시뻘건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은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불 맞은 짐승처럼 작은 방으로 뛰어들었다. 책장에서 책이 쏟아지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났고 무언가 퍽퍽 깨져나갔다. 눈을 감고 바닥에 널브러져 내가 한 행동의 결과를 듣고 있었다. 죄다 부수고 깨고 짓이겨도 좋으니 제발 당신 자신을 다치게 하지는 마. 나는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당신을 부수지는 마.

베란다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려오는 눈 사이로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지독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침묵했더라면, 차라리 내가 괴롭고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뚱이가 수은처럼 바닥에 스며들어 가라앉았다. 손바닥에 유리조각이 만져졌다. 손을 치울 기운도 없었다. 가는 실눈을 뜨고 바닥에 몸을 맡긴 채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까무룩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하얀 빛이 거실 가득 차있었다. 아침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과 빈 캔이 굴러다니는 혼돈 속에 누워있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역시 꿈이었구나 하고 다시 깨어날 것을 바랐다. 잠은 오지 않았다. 몸살이 난 것처럼 온 몸뚱이가 결리고 아팠다.

작은 방의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책과 노트, 연필꽂이에서 쏟아져 나온 필기구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책무더기에 걸린 문을 억지로 밀고 방으로 들어갔다. 찢어지고 펼쳐진 책 더미 사이에 뚜껑이 떨어진 노트북이 묻혀있었다. 망가진 노트북을 들어올렸더니 그리스에서 사온 음반이 꺾여 있었다. 미서에게 빌렸던 두꺼운 국어사전은 뽑혀나간 머리칼처럼 뭉텅 찢겨 속이 반은 비어있었다.

망가진 음반과 국어사전을 집어 들었다. 분노로 손이 떨렸다. 남편의 분노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어디에도 없는 남편을 향해 외쳤다.

'도망 가. 도망가란 말이야. 활을 든 것은 나야. 당신은 맨 몸이야. 덤비면 쏠 수밖에 없어. 무기도 안 든 당신을 쏴야 한다고. 다치거나 죽을 지도 몰라. 어디로든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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