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76>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27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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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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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어디로 가지도 않았고 나를 피하지도 않았다. 기묘한 동거가 이어졌다. 남편은 내가 연기나 그림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나 밖에 나가 밥을 사먹고 돌아 온 후, 안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작은 방은 내 영역으로 인정하는지 주방과 작은 방 근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거르지 않고 식탁을 차렸다. 밥을 하고 찌개나 국을 끓였고,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평소와 같이 아침을 차리고 점심과 저녁상을 보았다.

남편과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남편도 나도 약점 투성이의 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힘들고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심정이었다. 언뜻 생의 한 자락을 스쳐보았고, 삶의 골짝에 비밀을 엿본 것 같았다. 남편의 상처를 혀끝으로 핥아주고 싶었다. 예전에는 눈살이 찌푸리던 약점을 이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우 이제야 남편을 인간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원한다면 나는 어제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남편이 상처를, 그렇게 말하면 너무 뻔뻔스러운가, 내가 쏜 독이 묻은 화살 때문에 입은 상처를 치유할 때까지 나는 기다릴 생각이었다. 나는 이토록 담담한데 남편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남편에게 미안했다. 세상에는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스스로 극복하고 일어서지 않으면 남편과 나의 미래도 없었다.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남편이 바닥을 딛고 일어서기를 바랐다. 시간이 걸려도 참겠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 똑같아 보여도 어제와 같은 오늘, 조금 전과 같은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었다. 남편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작정이었다. 얼어붙은 땅도 봄이 오면 풀리게 마련이다. 그것이 세상 이치였다.

전병헌이 그리고 내가 쓴 만화가 모두 완성되었다. 정신희가 10권의 책을 집으로 보내주었다. 전병헌은 내가 쓴 스토리를 거의 건드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오히려 이런 부분은 조금 손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전병헌의 작업에서 그가 나를 인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전병헌에게 감사하다고 전화를 하고 싶었다. 전병헌이 보고 싶었다. 전병헌에게는 자신의 실수나 결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내공이 있었다. 아픔을 극복하는 순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이, 날마다 변하는 다른 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칩거하고 있는 안방을 바라보았다. 남편도 언젠가는 빠져나올 것이다. 시간이 걸릴 뿐, 전병헌에게 전화를 하려고 들었던 수화기를 도로 놓았다.

전화를 하지 않아도 전병헌은 느낄 것이다. 그의 그림으로 그를 추정하듯, 내가 쓴 스토리로 그는 나의 상태를 느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을 깨달았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처럼 마음이 평화스러웠다. 남편이 볼 수 있도록 식탁 위에 내 책을 올려두었다.

겨울이 지나갈 무렵, 출판기념회가 있다고 정신희가 전화를 했다. 나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편은 암체어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출판기념회에 같이 가자.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바람도 좀 쐬고."

남편은 내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늘 그런 지라 화도 나지 않았다.

"내 책도 좀 읽어 봐. 잘 팔리니까 아마 당신이 읽어도 재밌을 거야."

벽에다 대고 중얼거리는 느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받아야할 대가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근처에 흩어진 신문을 정리하려고 남편의 발 아래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출판기념회에 그 사람도 와?"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얼굴에 날카로운 긴장이 서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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