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지 마세요<177>

경인일보

발행일 2007-12-28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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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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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멍하니 남편을 올려보았다.

"출판기념회에 가면 우리는 그것으로 끝이야."

남편의 말은 단호했다. 불끈 치밀어 오르는 주먹과도 같은 덩어리를 나는 가라 앉혔다. 더 이상 참지 말자. 이 정도면 됐어. 할 만큼 했다고, 또 다른 내가 나를 향해 속삭였다.

"아니, 갈 거야. 내게는 중요한 일이거든."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편을 향해 말했다.

저녁상을 차려 놓고 나는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곧 봄이라 추위는 한풀 꺾였지만 밤 기온은 여전히 낮았다. 안방에 놓인 장롱처럼 움직이지 않던 남편이 거실로 나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내 말 잊은 건 아니지?"

나는 목에 두르던 머플러를 다시 풀어 손에 들었다.

"나를 믿어줘. 나는 당신과 헤어지지 않을거야."

"그렇다면 내가 경고한 말을 생각 해."

남편은 냉정한 표정을 지은 후,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게 선택하라는 의미일까. 일과 남편, 그런 게 선택의 문제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건 억지였다. 의자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을 거칠게 낚아채 나와 버렸다.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귀청을 흔들었다.

택시를 기다렸다. 겨울 그림자가 길게 기울어가는 늦은 오후. 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모직 머플러가 바람에 펄럭였다.

택시는 강변도로를 달렸다. 강 표면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비늘처럼 반짝였다. 겨울이 지나면 숨통이 트일까? 느닷없이 지하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생각났다. 겨울동안 지하에서 남편과 한철을 보내고 페르세포네는 봄에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다. 지상에서 보내는 세 계절 동안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한다.

겨울이 없으면 봄·여름·가을이 좋은 것이, 죽음이 없다면 생명이 귀한 것을 우리는 알기나 알까. 일상이 없으면 일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처럼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숨이 턱에 차올라 얼굴이 벌겋게 변할 때까지 숨을 멈췄다.

나는 운전사에게 차를 돌려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고. 내가 돌아가는 것은 상처 입은 작은 아이를 껴안아주기 위해서다. 외롭고 두려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던 작은 애였을 때 나는 누군가 위로해주기를 얼마나 바랐던지를 생각했다.

세상에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을 선택하고 저것을 버려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앞에 놓여있는 가장 약한 것, 가장 부서지기 쉬운 것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잘못 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떠오르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내일, 모레, 먼 훗날 어떻게 변할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 내 앞에 상처입고 신음하고 있는 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 손이 어떤 역할을 할지 나도 알 수 없다. 내가 쏜 화살의 독이라도 제거되기를 바랄 뿐이다. 상처 입은 짐승이 무모하게 덤비는 것은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을 거라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쓰러질지 어느 한 쪽만 살아남을 지.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될 것이다. 지금은 남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택시는 느리게 집으로 가는 길을 거슬러 달렸다. 서쪽 하늘에 짙은 보랏빛 구름이 천천히 흩어졌다. 곧 어둠이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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