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등반부대장인 최신식(30)씨가 산행 들머리부터 날머리까지 소개를 하는데 나눠준 안내서를 받아보니 다른 산악회와는 운영 방식이 다른 것이 산행을 조별로 편성해서 하는 방식과 설문지 코너가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조별 조장이 등반대장 역할을 맡아서 한다는 것인데 "젊은 사람들인 만큼 등반대장의 역할 부담을 줄여주고 조별간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라는 심명섭(37)회장의 설명을 들으니 산행을 어떤 식으로 할지 궁금해졌다.
백두대간이 품은 은티마을= "소백산맥이 품은 멋진 암봉미를 자랑하는 희양산(998m)에 가려진 2인자의 산이어서 발길이 적고 대간 종주자들에게만 알려졌던 산이었으나 희양산을 오르는 구간이 통제되고 있어서 앞으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왕봉을 찾게 될 것"이라는 이재현 등반대장(36).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희양산 봉암사를 성역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관계로 충북 괴산 땅의 은티마을이 등산객들의 집합소처럼 되어가고 있다"며 설명을 덧붙인다.
은티마을은 '괴산지명지'에서 표기한대로 조선초 생성된 지명으로 보이며 여느 산골처럼 개울을 따라 형성되어 산세가 마치 여인의 자궁을 닮아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마을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신라 선덕여왕이 세가지의 일을 알아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은티마을의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병사들을 찾아낸 일이다. 이 산골 마을에 그토록 등산객들이 몰리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은티마을을 기점으로 산행을 하기 적합한 대상지가 많기 때문이다. 은티마을에 서서 오른쪽에서 왼편으로 마분봉(776m) 악휘봉(845m) 구왕봉(877m) 희양산(998m) 시루봉(915m)이 늘어서 있고 그 산들이 백두대간의 중심을 이루는 산이어서 더욱 산꾼들이 즐겨찾는 곳이 되었으나 최근에서야 대형 버스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을 갖추는 등 이제껏 입소문으로만 찾던 동네였던 것이다.
이름표를 얻게된 구왕봉=조별로 나누어 몸풀기와 자기 소개를 마치고서야 산행에 나섰다. 아담한 과수원 길 사이로 밭을 일구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그늘진 숲길로 접어들어 40여분을 오르니 안동 권씨 문중 산소가 있는 오봉정 고개에 도착했는데 박문규(29) 회원이 배낭에서 수박 한 통을 꺼내어 가르는 것이 아닌가. 역시 젊음이 좋다면서 얻어먹는 수박 맛을 무엇에 비유할까 싶다. 산중 수박파티를 끝내고 다시 50여분을 오르니 정상석도 없고 조망도 안되는 나무 그늘의 구왕봉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고 그동안 이름표 없이 서 있던 봉우리에 작은 팻말 하나를 세우기 위해 작업들을 한다. '구왕봉'이란 이름표 하나를 얻게 된 정상에서 지름티재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멋진 소나무가 서 있는 암반이 있는데 이곳에서 희양산과 봉암용곡, 그곳에 자리잡은 봉암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봉암사 창건 내력은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남긴 유명한 '사산비명'중의 하나인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 자세히 적혀있다고 한다.
하루는 문경에 사는 심충이라는 사람이 지증대사 도헌을 찾아와서 자기의 땅인 희양산 봉암용곡을 바치며 가람을 세우기를 간곡히 청하는지라 대사가 따라가서 지세를 살펴보니 병풍같이 사방을 둘러싼 산은 마치 큰 봉황이 구름을 흔들며 날아오르듯 하고, 백겹으로 굽이 도는 물은 뿔 없는 용이 허리를 돌에 걸쳐 누워있는듯 한지라 이에 지증대사가 감탄하고 "만약 이곳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아마도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봉암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니 바로 당대 사상을 이끌었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이 탄생된 것이다.
드디어 대사가 절을 짓기위해 4기둥으로 지기를 누르고 연못을 메우려고 하니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 용들이 불을 뿜고 꼬리를 치며 난동을 부리는지라 즉각 도인의 신통력을 발휘하여 그들을 내동댕이쳐 쫓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쫓겨난 용들이 멀리가지 않고 하필이면 봉암사와 희양산이 잘 보이는 이 봉우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용들이 지증대사를 내려다보며 연못을 메우지 말고 살게해 달라고 날마다 빌었으나 소원을 들어주지 않자 그만 여기에서 돌로 변했다. 그 봉우리가 바로 구왕봉이고 원래는 구룡봉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출입금지 구역이 되어버린 희양산= 구왕봉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오는 길은 급경사로 겨울철이나 비오는 날에는 조심해야 할 구간이지만 3군데 정도에서 희양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기막힌 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희양산을 바라보던 김종윤(30·여)씨가 "자유롭게 걷고 힘차게 올라 넓게 보고싶어 산에 오는데 구왕봉은 삶에서 얻은 옹진 매듭 하나를 풀고 가기 좋은 산으로 기억 될 것"이라며 "마냥 앉아 바라보는 희양산의 암봉미가 너무 아름다워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다시한번 오고 싶다"고 말하자 심명섭(37) 회장이 "산에 오면서 성내고 조바심 내어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전망 좋은 바위를 지나 밧줄이 엮인 내리막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할 겨를도 없이 지름티재로 치닫는다.
문경과 가은을 넘나드는 최단 거리여서 이름지어졌다는 설과 희양산과 구왕봉을 오르는 길이 지름(기름의 방언)을 발라 놓은 것처럼 미끄럽다해서 지어졌다는 두 개의 설이 있는 지름티재에서는 희양산 방향으로 오르는 길을 봉암사 스님들이 목책을 치고 등산객들이 희양산 정상으로 오르는 것을 막고 있었다. "산 정상에서 노래하고 소리질러 대는 통에 조용히 수행하기 어려워 나와서 지키게 되었다"고 스님 한 분이 설명해 주신다. "결국 산에 오는 것도 못오게 하는 것도 우리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옥죄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박문규(29)씨를 보니 참으로 멋진 친구 하나 얻은 기분이 들었다.
은티마을에서 안산까지의 귀로가 지겹지 않고 내내 즐거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젊은 산꾼들이 만들어가고 가꾸어가는 산악회가 멋져 보이고 부러웠기 때문이었고 스스로를 일꾼이라 칭하는 조별 조장들이 이끄는대로 따라주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는 회원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한 산행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산행안내
은티마을~마분봉~악휘봉~오봉정재~은티마을 (3시간30분)
은티마을~오봉정재~구왕봉~지름티재~은티마을 (4시간)
은티마을~지름티재~희양산~시루봉~은티마을 (4시간)
■ 교통
대중교통 : 충주~수안보~연풍 (직행버스 20~30분 간격, 40분 소요)
자가용: 중부내륙고속도로~수안보~연풍~은티마을
■안산 '산을 찾는 사람들'
노동운동이 한창이었던 시대 상황과 맞물려 일반 노조원들이 함께 하였던 시대를 지나 현재는 일반적인 회사원들과 근로자들이 근간을 이루어 운영되는 비영리 산악회로 안산지역에서 뛰어난 활동성을 보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봄, 가을에 회원들의 가족들과 함께 체육대회도 하며 무엇보다도 인터넷상에서 이뤄지는 정보 교환과 인적 교류가 활발하여 회원수가 2천명이 넘는다.
전문 등반을 이끄는 40대층과 일꾼을 자임하는 30대 주류층이 20대층을 이끌어가는 보기 드문 젊은 구성원들로 이뤄진 산악회여서 패기와 왕성한 혈기가 돋보이는 산악회이다.
홈페이지: cafe.daum.net/rlflso
회장:심명섭(017-503-0422)
총무:구은숙(010-289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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