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덕적도

해당화 수줍게 핀, 그 섬에 가고싶다…

강승훈 기자

발행일 2008-07-09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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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 와서 놀더라

아버지는 저녁까지 모래밭에 숨을 놓고 놀다

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놀다
가더라

해당화밭이 애타는 저녁까지

소야도가 문갑도로 문갑도가

다시 굴업도로 해걸음을 넘길 때

1950년이나 1919년이나 그 이전(以前)이

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


                         - '덕적도 시-1 해질녘' 전문

1991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덕적도 출신 시인 장석남이 그린 고향 덕적도다.

덕적도에 뿌리를 내린 '아버지'가 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해걸음을 넘기는 역사의 흐름속에서 '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고 그리고 있다.

   
지난 3일 오전 9시30분, 인천 연안부두에 대기 중이던 모든 여객선이 짙은 안개로 결항됐다. 이곳 부두에서 남서쪽으로 77㎞ 떨어진 덕적도. 실제 운항시간이 1시간도 채 안 되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오후 배편의 출항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이 묶인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기상이 점차 호전됐고 탑승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리자 꼬박 3시간 넘게 기다린 지루함도 잠시, 이들의 얼굴에는 섬으로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스쳤다.

덕적도(德積島)는 '덕을 많이 쌓았다'라는 풀이와, 크고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란 뜻의 우리말 '큰물섬'을 한자화했다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8개 유인도와 34개의 무인도로 형성된 군도(群島)의 중심. 선박이 닻을 내린 도우선착장은 과거 인근 소야도를 건너기 위한 나루터였다. 이날도 한 무리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려는 종선이 여객선을 기다리며 일찌감치 정박 중이었다.

"우럭 1㎏에 3만원, 도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연산으로 정말 싼 거예요."

좌판에 생선 몇 마리를 깔고 흥정을 벌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로 포구는 금세 활기가 넘쳤다. 배가 들어오는 시각에 맞춰 운행되는 순환 버스가 시동을 걸고 손님을 맞았다. 차가 5분쯤 달렸을까. 왼편으로 면사무소가 보였다. 3개의 리(里)로 구분되는 덕적도 행정구역중에서 중심지인 바로 진리(鎭里)다. 보건소, 농협 등 각 기관이 몰려 있다.

특히 섬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꼽히는 덕적초·중·고교가 이곳에 자리했다. 지금은 유치원부터 통합 운영되지만 개교 시기는 모두 다르다. 공립초교가 1933년 문을 연 이후로 1955년과 1979년에 각각 중학교, 고교가 그 뒤를 이었다. 섬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공부하고 뛰노는 장소이다. 올해까지 초교는 총 2천942명, 중학교 2천290명, 고교 38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차츰 육지로 떠나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 2008년도 입학생이 전 과정을 통틀어서 32명에 그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 소나무 숲에 둘러 싸인 덕적 초중고등학교.

학교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해당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백년도 넘을 듯한 노송(老松)이 주변 울타리를 만들었고 너머로 엿보이는 푸른 바다 모래땅엔 분홍 빛깔의 해당화가 수줍게 폈다. 600여 그루의 해송은 그 빼어난 자태 덕분에 국내 몇 안 되는 보호림이다.

"얼마 전까지 이웃 동네를 오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죠. 내년께 회주도로가 완공되면 마을간 자동차로도 다닐 수 있어요."

20년 전 경인일보 연재 기사에서, 이장용(당시 54세)씨가 언급한 군도 정비사업은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 착공 20년이 넘도록 소야~능동선(9호선), 진리~북리선(10호선)등 섬 한 바퀴를 도는 연장 24.8㎞ 2개 노선 가운데 일부 구간이 미포장으로 남은 것이다.

진리에서 도로를 따라 달리면 밭지름해변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길을 안내한다. 부드러운 황금빛 모래사장을 감상하다 뒤를 돌아보면 나는 새의 형상을 빗댄 비조봉(飛鳥峰)이 솟아 있다. 292로 그다지 높진 않지만 적송림의 울창한 숲 꼭대기에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정자가 장관이다.

   
▲ 크고 작은 고운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과 주변의 기암 괴석이 어우려져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 북리 능동자갈마당.

군도 9호선으로 맞닿은 서포리는 100년 개장의 역사를 간직한 해수욕장으로 더욱 유명하다. 서해에서는 보기 드문 자연상태의 해변을 노송 1천여 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 길이가 2㎞, 남·북 간의 폭은 넓게 600에 달한다. 섬 내에 다양한 편의·숙박시설이 집중돼 휴양객이 즐겨 찾았다. 과거 경인일보는 썰물 때에도 여전히 고운 모래가 드러나는 백사장 때문에 으뜸 피서지로 서포리를 소개했다.

   
▲ 여객선인 쾌속선으로 50분이면 갈수 있는 덕적도에는 평일에도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다. 도우선착장에 관광객들이 내리고 있다.
이러한 단골 명소도 시설 노후화 등 악재가 겹치면서 갈수록 휴양객이 감소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바가지 요금'이 방문객들의 외면을 부추겼다. 김성현 덕적면 산업담당은 "여름철 외지인에게 숙소를 통째로 빌려주고 목돈을 만지겠다는 분위기가 퍼졌었다"며 "때문에 장사치들은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려받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면에서 집계한 통계수치를 보면 연간 관광객 수는 1999년 7만9천93명으로 최대를 이루다가 그 다음해 6만1천526명으로 급감했으며 2005년엔 3만5천887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매년 치솟는 선박 이용료도 한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서포리의 또 다른 특징은 대규모 간척사업이다. 예로부터 험한 산세와 평야를 찾아보기 힘든 자연환경으로 농업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어업이 발달해 덕적도의 어선들이 강경, 논산, 평택 등지로 조기, 새우젓을 싣고 가 농산물로 바꿔왔다. 인천시립박물관의 덕적군도 학술조사에 따르면, 덕적의 숙원은 쌀을 자급자족하는 것으로 1960년 갯벌 매립이 첫 시작된 후로 몇 차례 중단을 거듭하다가 1974년 최분도 신부가 이 일을 맡으면서 본격 착수됐다. 서쪽 끝 벗개라고 불리는 마을앞 바다를 막아 안쪽으로 논을 만든 것이다. 1982년 완공으로 새로 생겨난 개척지는 70만여㎡로 식량증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최 신부의 도움 덕에 덕적은 천주교와 인연이 깊고 동네 어귀에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관광객의 첫 발길이 닿는 진리 도우선착장에서는 갓잡은 자연산 싱싱한 회를 맛볼수 있다.
섬은 사방이 바다지만 어촌계는 북리(北里) 한 곳이다. 지리적으로 수심이 깊고 어종이 풍부했던 탓에 한때는 9천여명이 모여살 만큼 번창했다. 1970년대 전성기를 이루던 꽃게 어장이 차츰 동(東)중국해로 바뀌면서 지금 어선들은 인천을 모항으로 삼고, 여기에선 그물을 손질한다. 아직 꽃게와 관련된 소일거리는 섬 인구의 42%, 382가구의 주 소득원이기도 하다. 북쪽에 위치한 능동자갈마당은 크고 작은 자갈이 빽빽하게 깔려 있어 주변 기암괴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1994년 12월 조용하던 섬 전체가 들썩이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가 핵 폐기물 처분장으로 인근 굴업도를 검토 중이며 과학기술처는 같은 달 22일 부지 낙점에 따른 공식 발표를 한 것이다. 방사능 유출사고와 농산물 판로중단 등 생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덕적 주민들 사이에서 강하게 일어났고, 반대투쟁위원회가 구성돼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11개월이 흐른 뒤 굴업도 두 곳에서 활성단층이 발견되며 정부 계획은 완전 백지화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굴업도와 덕적 주민 간의 찬반을 둘러싼 감정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 있다. 세상사의 어지러움과 번뇌가 오늘도 서해 물살에 떠밀려와 송림 우거진 모래밭에서 놀다 가는 덕적도도 여느 섬들처럼 주민들도 줄어들고, 찾는 이도 많지 않은 섬으로 외로움 속에서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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