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울도

뱃길 험해 울고 훈훈한 인심에 우는 낙도

임승재 기자

발행일 2008-10-01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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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도에서 바라본 울도"
바로 이웃하고 있는 백아도에서 바라본 울도(가운데)가 안개에 잠길듯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케하고 있다.

   
꽃게잡이 그물을 손질하는 나이 지긋한 아낙들의 주름진 손끝이 마냥 분주하다. 오랜만에 가을 꽃게가 풍어를 이루면서 서해 먼바다에 있는 인천의 한 작은 섬도 모처럼 활기를 되찾아가는듯 싶다. 척박한 땅에서 그물 손질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가는 섬 주민들에게 꽃게 풍년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게 우리 밥 벌어먹이는거여. 논이 있어, 밭이 있어. 바다 속만 들여다보고 사는 것도 오래 전이여. 배도 진작에 다 팔아버려서."

이러저리 뒤엉킨 그물을 풀어내는 한 노인의 넋두리에서 사연 많은 지난 세월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울도(蔚島).

   
▲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작은 마을의 척박한 땅에서 수확한 고추가 마을 한복판을 차지한채 정성스럽게 말려지고 있다.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에서 가장 먼바다로 나앉은 섬이다. 간간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낚시꾼을 제외하곤 좀처럼 외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않는 곳이다. 하루에 한번씩 덕적도에서 문갑도와 굴업도·백아도를 순항하는 객선이 울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편이다. 뭍에서 너무 멀어, 들어올 때는 힘들어 울고, 나갈 때는 섬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에 떠나기 섭섭해 울고 간다는 섬이다. 인근 섬 사람들은 이 곳을 '울섬'이라고 부른다.

덕적도에서 낚시꾼 일행과 함께 울도를 향하는 배로 갈아탔다. 옅은 안개로 덮인 바닷길을 두 시간 남짓 갈랐을까. 저 멀리 울도 선착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덕적에서 남서쪽으로 23㎞ 남짓 떨어져 있지만 덕적에서 출발한 객선은 문갑·굴업·백아도를 돌아 울도에 도착하다보니 두시간 뱃길이다.

오랜만에 섬을 찾아온 외지 사람들의 모습에 꽃게잡이 그물을 손질하는 장기자(68) 할머니가 일손을 잠시 멈춘다.

"반가워여. 식사는 어떻게 하고 오셨어여?"

식사부터 챙기는 인심이 넉넉하다.

섬 마을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팔딱거리는 어른 손바닥만한 생선을 좌판에 깔아놓고 손님과 흥정을 벌이는 아낙들의 걸걸한 입담도, 바다에서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선들의 뱃고동 소리도 없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덕적초등학교 울도분교는 폐교된지 이미 오래고, 선착장에 홀로 서있는 주인 잃은 폐선의 모습은 쓸쓸하기까지 했다.

하룻밤 묵을 집을 정하고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비탈진 언덕으로 작은 텃밭이 여럿 있다. 호박이나 깻잎 등을 기르는 것이 울섬 밭농사의 전부다. 그마저도 텃밭에는 크고 작은 자갈이 널려있다.

울도는 삶이 척박해 섬에 들어온 사람치고 울지않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지난 1989년 6월15일자 경인일보 지면에 그려진 섬 주민들의 삶도 갑작스런 흉년에 고단해 보였다.

"농사가 거의 없는 이곳에서 주민들은 오로지 게잡이에 매달려 살림을 꾸리지만 특히 올해는 흉어라 걱정이 여간 아니다. 게가 잘 잡혀야 뱃일이 많아지고 따라서 그물손질 따위의 뒷일도 많이 생기기 마련인데 올해는 출어비도 미치지 못할 만큼 빈 그물을 건지는 일이 허다하다.(이하 생략)"

20년사이 섬 주민들의 삶은 더 쇠잔해진듯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울도에는 50~60t급 꽃게잡이 어선이 다섯 척 넘게 있었다. 육지에 따로 집을 사놓을 정도로 남부럽지 않았다.

다른 섬에서 온 어선들까지 울도에 그물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 배를 타지않는 부녀자들은 어구 손질만으로도 한 해에 수천만원씩 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거듭된 바다 흉년 탓에 외지로 빠져나가는 섬 주민들이 하나둘씩 늘어만 갔다. 큰 마을과 작은 마을을 합해 160명 안팎에 이르던 인구는 현재 4분의1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 어선도 이제는 우럭과 놀래미 등을 잡기 위한 3t급 이하 낚싯배 몇 척이 전부가 돼버렸다. 그나마 남아있는 꽃게잡이 어선 한 척도 조업에 나갔던 적이 오래 전 일이다. 부녀자들의 일감이던 그물 손질은 생명줄과도 같은 울섬 주민들의 주된 생계 수단이 됐다.

   
▲ 꽃게가 풍어를 이루면서 울도 주민들이 꽃게 그물손질에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렁게 등으로 미처 그물에서 떼어내지 못한 채 썩어가는 꽃게들로 심하게 풍기는 악취속에서도 온종일 그물손질을 하고 있는 주민들.

섬에서 대대로 살아온 어촌계장인 정광성(73)씨는 "보통 빚을 지고 배를 짓는데 꽃게가 딱 끊기니까 견디지 못하고 망한 선주가 여럿 있다"면서 "집까지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말했다.

고된 삶때문이었을까. 노인들은 대부분 울도가 한창 번성했던 때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새우잡이로 유명했을 때는 뱃사람치고 울도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연평도 다음 가는 어장으로 평가받는 시절이었다. 외지 사람들의 잦은 발길에 작은 마을에는 '색시집'으로 불리는 술집도 70~80군데나 있었다.

고인이 된 정의석(당시 81세)씨가 20년 전에 울섬을 찾은 당시 취재기자에게 한 말이다.

"울섬 주변에선 새우를 많이 잡았지요. 일정 때부터 였으니까 한 50년쯤 된 것 같은데, 그때가 울섬 생긴 이래 최고로 잘 살았던 때 같아요. 덕적 돈은 다 울섬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울섬 주위에서 잡은 새우는 근처의 지도(池島)에서 말려 포장한 뒤 중국으로 실려 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새우가 흔적을 감추다시피했지요."

   
▲ 마을 곳곳에서 볼수 있는 생선말리는 모습이 전형적인 어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물 손질을 하던 정현희(71) 할머니도 새우잡이가 성했던 어린 시절의 옛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내가 꼬맹이였을 때는 새우가 말도 못하게 많었어. 예전같으면 새우잡이 소리에 밤잠을 못잘 정도였으니께."

20년 전보다 형편이 나아진 것도 있다.

뭍으로 오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덕적도와 울도를 연결하는 객선이 최근 5~6년 전부터는 격일제에서 매일 한차례씩 운항한다. 당시 5만원은 가져야 육지를 갔다온다는 말도 있었다. 울도에서 덕적도를 거쳐 인천 연안부두까지 갔다오는 뱃삯이 5만원 정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옹진군에서 요금을 지원하고 있어 반값이면 충분하다.

물이 넉넉해진 것도 섬 마을의 큰 변화다.

20년전만 해도 울도는 가뭄이 한번 들면 당장 마시고 써야할 물이 부족해 가슴을 조여할 때가 많았다. 바위 틈에서 나오는 물을 마을 어귀에 있는 우물에 모아 나눠쓰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하수를 뚫어서 넉넉하게 물을 쓰지는 못해도 생활에는 전혀 불편이 없다.

마을을 거닐던 한 노인은 턱없이 물이 부족했던 옛 기억때문인지 "항시 틀어놓으면 물이 딸리니까 최대한 아껴 쓴다"고 말했다.

최근 울도는 또 한번의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울도가 태풍 등 기상악화로 인한 어민들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서해안 조업 어선의 대피장소 중간 보급기지 기능을 갖춘 어항으로 확장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동(東)방파제와 서(西)방파제 공사는 이미 완료된 상태고, 물양장 공사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현재 밀물이 들어올 시간에는 객선을 정박하는 선착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울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덕적도로 나가는 객선을 기다리며 전날 어촌계장인 정광성씨가 꺼낸 말을 떠올렸다.

"울도의 울(蔚)자는 왕성한 기운을 뜻하지요. 옛날 노인들은 새우잡이가 성하기 오래 전에 보리로 연명하던 시절이 있어 살기 어려워 울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울도 앞바다의 어족이 항상 풍성하다는 뜻에서 지어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울도를 찾게 되면 어선으로 넘쳐나는 항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진/임순석기자 ssw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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