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문갑도

그물 가득 '만선의 추억'을 찾아서…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08-10-29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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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도(文甲島)는 문갑(文匣)과 닮지 않았다. 문갑은 옛날 선비들이 문방구와 문서를 넣어두는 세간을 뜻한다. 한자 표기도 다르다.

인터넷과 백과사전은 문갑도 지명 유래를 '문갑과 닮아서 지어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관할청인 옹진군 홈페이지도 마찬가지다.

지난 21일부터 3일 동안 문갑도에 머물렀다. 작은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웅현(66)씨에게 섬 이름에 대해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답했다.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예요. 원래 물갑도였대요. 이곳은 산이 높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에요. 최근까지도 우물이 5곳이나 있었어요. 조선시대 말엽에는 가뭄이 들면 울도, 지도, 굴업도, 승봉도 사람들이 물갑도까지 물을 길러 왔다고 해요. 갑(甲)은 첫째를 나타내는 말이고요."

   
▲ 학생수의 감소로 1999년 폐교된 문갑초등학교

20년 전 경인일보가 연재한 '섬섬섬' 시리즈에 문갑도는 빠져 있다. 문갑도는 섬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덕적도 진리선착장에서 해양호를 타고 20분 정도만 가면 닿는 곳에 있다.

가까이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 문갑도다. 2008년 10월 현재 이 섬에는 53가구에 103명이 주민등록을 두고 있다. 김현복 이장은 "실제 섬에 살고있는 주민은 약 80명 정도고 고령자가 많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문갑도의 과거'를 물었다. 주민들이 끄집어내 보여준 기억 속 풍경은 희미했다. 그러나 문갑도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시끌벅적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20년 전까지 마을에서는 두레굿이 열렸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창호지에 소원을 적으면, 이것을 모아 지푸라기로 만든 배에 넣고, 이 배를 물에 띄워 보내는 마을 잔치였다고 한다.

이후 2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7년부터는 발전소가 생겨 하루 24시간 전기를 쓸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자가발전기를 활용해 오전 5~10시, 오후 6시에서 12시까지만 전기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 앞 해변에 있는 문갑내연발전소는 하루 600㎾의 전력을 생산한다. 문갑초등학교는 1999년 문을 닫았다. 폐교 당시 학생 수는 남자 2, 여자 3명이었다. 아이들은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문갑도에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

문갑도에서 태어난 배종만(59·남구 학익동)씨와 해양호 선상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과거 옹진군이 부천군에 속했던 때 문갑도는 부천에서 2번째 가는 부자동네였어요. 배가 많았거든요"라고 전했다.

1960년대까지 섬 부근에서는 새우와 조기가 많이 잡혔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새우의 80%가 문갑도 앞바다에서 나온다는, 약간은 과장섞인 말이 돌던 때였다. 어선 수만도 100척이 넘었다. 승봉도, 이작도, 덕적도, 소야도 등에서 배를 타러 문갑도까지 왔다. 풍어제가 열리는 날은 마을 축제였다. 아이들은 배를 돌며 제상에 올려진 떡과 조기, 건어물 등을 몰래 빼먹었다. 폭이 약 300에 이르는 마을 앞 해변은 오색깃발을 달고 정박한 배들로 가득해 장관을 연출했다고 한다.

이북에서 피란 내려와 정착한 이들과 선원들로 붐빈 해변에는 술집 2곳이 생겨났다. 섬 할머니들의 말을 빌리면 "고기는 안 잡고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다"고 했다. 당시 이북 피란민 출신 박모씨가 운영하던 식당은 외상 술값을 대신해 어선을 받아 팔아넘겼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한다. 이를 참지 못한 섬 여성들이 모여 술집에 가 내부 기물을 때려부쉈다. 이후 40~50년간 문갑도는 술집이 없는 전통을 이어왔다.

새우를 보관할 수 있는 독을 만드는 공장도 2곳이 있었다. 한월리해변 양쪽 끝자락이 독공장 자리였다. 독공장마다 10~20명의 직원이 있었다. 공장 주변에는 직원 숙소도 있었다. 독을 구웠던 토굴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독공장은 싼 가격의 드럼통이 대량 생산 유통되면서 결국 문을 닫게 된다.

   
▲ 한 주민이 직접 수확한 콩을 정성스레 말리고 있다.

남중심(82) 할머니는 덕적도에서 문갑도로 시집왔다. 일본사람들이 처녀는 공출해 간다고 해 부랴부랴 문갑도로 건너왔다. 당시 남 할머니 나이는 18살이었다. 이듬해 8월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1950년. 전쟁의 포화는 외딴 섬에도 찾아왔다. 인민군과 국방군(연합군)이 차례로 섬에 왔다. 국방군은 섬에 들어오기 전 해변과 산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고 한다. 배는 모두 불타 가라앉았다. 혹시 숨어있을지 모르는 인민군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문갑초등학교 마룻바닥 아래에 노동당 입당원서 서류를 두고 갔다. 국방군은 이들을 찾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장을 찍은 이들은 갈대숲에, 갯바위 틈에, 산속 굴에 숨어 지냈다. 문갑초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김종철이란 총각 선생이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한 것이다"고 나서 혼자 잡혀갔다고 김웅현씨는 전했다.

   
▲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덕적파출소 문갑초소
그해 동짓달, 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섬 남자들은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남중심 할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했다. 다행히 남편은 이듬해 5월에 돌아왔다.

현재 문갑도에는 꽃게잡이배 광복호를 비롯해 태광, 옥잠, 영덕, 성영호 등 배 8척이 남아 있다. 문갑도 남쪽 바다에서 '그물이 터질 만큼' 잡히던 새우는 씨가 말라버린 지 오래다.

마을 주민 상당수는 바다쓰레기를 수거하는 공공근로를 해 일당을 받고, 굴을 따 인천에 내다 팔아 돈을 번다.

젊은 사람들은 뭍으로 나갔다. 한국전력으로부터 발전소를 위탁해 운영하는 (주)전우실업에서 일하는 20대 중반의 직원이 가장 어린 주민이다.

전우실업 직원들은 해양호가 도착하기 전 1.5 트럭을 끌고 선착장에 나온다. 배에 싣고 온 짐을 옮겨주고, 다리가 아픈 주민들을 태워주기 위해서다.

'섬개발 열풍'이 불던 3~4년 전에는 부동산 투자를 위해 문갑도를 찾는 외지인이 많았다고 한다. 문갑도 남쪽 해변에 있는 작은 산은 한 중소기업인이 매입했다. 여름철에 직원들이 쉴 수 있는 휴양터를 만들겠다는 이유였다. 며칠 전에는 외지인들이 이 임야를 보러 왔다가 투자를 포기했다. 땅 주인은 마을 이장에게 전화해 "말 좀 잘해주지 그랬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장은 땅을 보러 온 사람들 얼굴도 보지 못했다.

문갑도 마을 앞 해변 한 구석에 있던 마을터는 흔적조차 사라졌다. 인근 선갑도와 충남 앞바다 쪽에서는 모래를 퍼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로 인해 모래가 사라지고 있다. 마을터 앞 모래사장에는 성인 남자 키높이의 자주색 철근이 박혀 있었다. 2~3년 전 해양연구원 박사들이 나와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설치 당시보다 70㎝ 이상의 모래가 유실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이러다가 갯바위만 남게 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모래가 사라지는 만큼 관광지로서 섬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어선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며 섬에 들어왔다. 징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머니들은 "저게 우리 배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조용히 되뇌었다고 한다.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문갑도는 어떤 모습일까? 주민들은 관광지로 탈바꿈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1년에 한두 번 섬을 방문하는 옹진군수는 "모래를 파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고 한다.

사진/윤상순기자 yo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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