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백령도·上

'두무진 포구 멸치후리는 소리 잦아들다'

정진오 기자

발행일 2008-11-12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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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이탈리아 나폴리와 더불어 전 세계 두 곳 뿐인 천연비행장인 사곶해변. 백령도 동남쪽 진촌리 사곶마을 해변에 위치. 길이 3㎞,폭 0.2㎞의 천연해변으로 시멘트처럼 미세한 모래가 단단하게 다져져 비행기나 자동차, 오토바이가 달려도 바퀴가 모래에 빠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 사람들이 사는 모양새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20년 전에 만났던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30대 젊디 젊던 청년이 50대 장년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새파랗게 젊던 어민 후계자 장태헌(56)씨는 다시마 종묘 양식의 국내 최고 기술자가 돼 있었다. 20년 전 경인일보는 그를 '작은 어선을 한 척 장만할 꿈을 가꾸고 있는 젊은 사람 중 하나'로 그렸다. 어촌계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전복이나 가리비, 멍게 양식에 관심을 보인다고도 했다. 바다에서 잡는 것만으로는 수지를 맞추기도 어렵고 기복이 너무 심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라고도 했다.

   
▲ 20년전 총망받던 어민후계자는 조합대표가 되고, 섬 최초 차량정비소 사장은 '우럭낚시' 세월을 낚고…
그는 지금 '백령바다영어조합법인'의 대표이사다. 여기에선 슈퍼다시마 포자를 개발·생산하고 2년산 다시마를 생산·가공·유통한다. 해조류연구소도 뒀다. 다시마 양식에 도전한 지 19년 됐다는 장태헌씨는 "다시마에도 명품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어업은 생산개념의 1차산업에서 가공하고 유통하는 2차, 3차 산업으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어민 후계자가 된 지 25년 째란다. 20여년 만에 큰 결실을 거둔 그는 분명 '선구자'였다. "19년 전에는 전남 완도에서 다시마 종묘를 가져왔는데, 이제는 그곳으로 '역수출'한다"고 자랑하는 그는 "다시마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은 대한민국에서 여기 백령도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했다.

용기포에 사는 김진수(51)씨는 까나리액젓을 만든다. 30년이 넘었다. 올해 그는 200ℓ짜리 100통을 생산했다고 한다. 돈으로 치면 2천만원 정도 된단다. 20년 전에 그는 까나리로 당시 돈 1천여 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까나리는 백령도와 대청도 중간 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시기는 5월과 6월이다. 까나리와 소금을 3대1 비율로 섞은 뒤 숙성시킨다. 1년 반 정도 숙성된 게 가장 좋다고 한다. 숙성이 잘 되면 그해에 액젓을 뽑기도 한단다. 아주 오래전에는 항아리에 숙성시켰는데, 지금은 플라스틱 통에 숙성시킨다. 20년 전에도 그랬다.

   

   
어촌계 공동어장에서 전복이며 해삼, 성게 등을 잡는 김씨는 잠수부이기도 하다. 최근에 자부심을 갖는 게 하나 생겼다. '물범 박사'란 호칭이다.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물범이지만 그는 작년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뛰어들었다. 지난 6일 기자는 김씨의 배를 타고 천연기념물 제331호이자 백령도의 자랑인 물범을 보러 갔다. 이날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여객선 운항이 통제됐다. 오후에 바람이 잦아들었고, 김씨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용기포항에서 물범들의 숨터격인 '물범바위'까지는 10분 남짓 걸렸다. 100여 앞까지 갔다. 김진수씨는 암수를 구분할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은 물범떼가 김씨의 배는 알아본다고 했다. 김씨 배가 가까이 가도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는 마침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 관계자들도 백령도에 들어와 있었는데, 김씨의 배를 함께 타고 가지는 못했다.

20년 전 경인일보가 백령도에서 만났던 정명암(55)씨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경진공업사라는 이름의 차량 정비소를 운영했다. 부친 정장화(작고)씨가 백령도에서 처음으로 낸 정비소였다. 지금은 대우자동차 간판을 달고 있었다. 부친은 일제 때부터 기계 다루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었고, 정비소를 했다고 한다. 26년 전만해도 1곳 뿐이었던 정비소는 20년 전에는 2~3곳이었고, 지금은 5곳이나 된단다. 10여 년 전만해도 장사가 잘 돼 종업원까지 둘 정도였는데, 지금은 고치려는 차 한 대 없을 만큼 불경기라고 했다. 낚시광이기도 한 그는 5년 전에는 아예 배를 샀고, 낚시로 잡은 우럭을 팔아 올리는 부수입이 짭짤하다고 한다. 그는 "배를 타고 나가 하루에 잘 하면 20만원 벌이는 된다"고 했다.

   
4천850명(남자 2천581명, 여자 2천269명)이 사는 백령도의 면적은 50.96㎢다. 농지가 31.6%인 16.13㎢이다. 임야는 60%에 가까운 30.52㎢다. 어업을 하는 인구보다 농사 짓는 사람이 더 많은 곳이 백령도다. 전체 가구의 33%인 718가구가 농가라고 한다. 어가는 8%에 불과한 174가구란다. 나머지 59%인 1천348가구는 기타로 분류된다. 식당, 숙박업 등 서비스업이란 얘기다. 자동차는 1천892대나 됐지만 어선은 123척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2곳과 중·고등학교가 각각 1곳이다.

인천항에서 백령도까지는 여객선으로 4시간이면 된다. 하루에 세 차례나 여객선이 뜬다. 20년 전만해도 1주일에 단 두 번 뿐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10시간 이상씩 걸렸단다. 지난 4일 오전 8시 인천항을 출발한 백령도행 데모크라시호는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360명이나 탔다. 주민도 있었지만 관광객이 많았다. 올 9월부터는 인천시민에게는 여객선 요금의 50%를 할인해 주고 있다. 백령도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관광산업도 덩달아 커졌다. 백령도에만 여행사가 7곳이나 된다. 이들은 백령도유람선협회도 만들었다. 많을 땐 하루에 1천여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백령도 용기포항에 내리면 공항 출국장과 비슷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여행사 직원들이 사람 이름을 적은 푯말을 들고 서 있는 풍경이 그것이다.

서울 효자동에 산다는 박옥지(59)씨는 칠레에 이민간 친구 송윤정씨와 둘이서 백령도를 찾았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칠레로 간 친구가 모처럼 찾아와 택한 여행지가 백령도라고 했다. 박씨와 송씨는 백령도 곳곳을 도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장산곶 등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백령도는 '해병대의 섬'이기도 하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판에는 붉은 색 옷을 입은 해병대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주민들의 일손을 돕는 중이었다. 해병대가 없으면 농사짓기 어려울 정도로 군인들의 대민지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백령도에서 나는 쌀 등 먹을거리 상당수가 군부대로 들어간다. 민·관·군이 함께 하는 체육대회도 이틀에 걸쳐 열리기도 했다.

예전엔 백령도 멸치도 유명했다고 하는데, 그 멸치배를 끄는 집은 많지 않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그에 비해 벌이는 신통치 않기 때문이란다. 두무진 포구에서 멸치를 하는 집은 단 2곳 뿐이라고 한다. 멸치를 삶던 최순자(52)씨는 "5~6년 전부터 관광객이 많아지고, 횟집이 생기면서 주민들이 멸치를 그만 뒀다"고 했다.

   

   
여수에서 시집왔다는 최씨는 "처음에는 답답해서 뭍으로 나가려고 보따리를 쌌다가 배를 타고 고생할 걱정에 그만 둔 적이 많았는데, 이제는 여기가 좋다"고 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무섭다고도 했다.

백령도의 겨울은 조용하다. 주민 상당수가 도회지로 나가 있기 때문이다.

김예찬 백령면장은 "12월에서 2월까지는 주민들이 자식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가 있어 60% 정도의 집이 빈다"면서 "면사무소는 그 빈집을 관리하는 게 중요한 일이 될 정도"라고 했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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