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연평도 어업조합

하루 출납고가 한국은행보다 많았던… 파시철, 바다에는 넘치는 조기… 연평엔 넘쳐나는 장사꾼

경인일보

발행일 2009-05-13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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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연평 꼭대기 실안개 돌고 우리 집 문턱엔 정든님 들고
2.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연평 바다로 돈 실러가세
3. 뱀자네 아주마이 인심이 좋아서 막뚱딸 길러서 화장이 줬다네
4. 백년을 살자고 백년초를 심었더니 백년초가 아니라 이별초드라
5.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 고기잡이 간 님 고생하네
(후렴)니나 니나 깨노라라 아니 놀고 무엇할 소냐 /연평도 '니나나 타령'

#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

연평도 여자들은 뱃일 나간 남자들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다리며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바가지 장단을 치며 즉석에서 매김 소리를 넣고 부르던 그 노래가 '니나나 타령'이다. 니나나 타령은 연평도의 아리랑이었다. 뱃사람의 아낙들은 언제 남편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을 노래를 통해 잊으려 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아이들은 달마중을 나갔다. 말린 풀을 자기 나이 수만큼 작은 단으로 묶어 들고 뒷동산에 올랐다.

1960년대까지 연평도의 집들은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기와집은 드물었다. 살림살이가 다들 고만고만했다. 배를 부리는 연평도 사람 중에는 한 4~5년 조기잡이를 해서 돈을 벌면 뭍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충청도 지방으로 나가 논을 사서 농사를 지었지만 더러 인천 등지에 상점을 여는 사람도 있었다. 연평도에는 조기만이 아니라 굴과 조개, 새우(白蝦)도 많이 났다. 1936년 8월에는 연평도에 몰려든 새우잡이 어선이 600여척에 달하기도 했다. 연평도 사람들은 굴을 깨거나 새우젓을 담가두었다가 연백에 나가 쌀이나 조 등의 곡식과 바꿔왔다. 한 번 굴 장사 갔다 오면 벼나 조가 몇 가마씩 쌓였다. 그것으로 일 년치 양식을 했다. 굴은 쩍이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씻은 뒤 볏짚으로 엮은 '굴 오재비'에 담아 가서 팔았다. 방수가 되는 굴 오재비에는 바닷물을 채워 굴의 신선도를 유지했다.

   
▲ 연평도 앞바다.

# 물동이 이고 물장사하던 연평도 여자들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연평도의 여자들도 바빠졌다. 연평도에 정박한 배들은 물과 식량, 장작 등을 보급받았다. 여자들은 이때를 틈타 물을 팔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갯가에 늘어섰다. 동쪽의 된진몰 해안부터 서쪽의 소상개 해안까지 물동이를 인 여자들이 물을 이어 날랐다. 수천척의 배가 보통 열흘 넘게 마실 물을 저장해야 했으니 동네의 큰 우물이 자주 말랐다. 한 배당 3~5드럼(50~60동이)의 물이 필요했다. 물은 주로 초등학교 앞 큰 우물이나 천주교회 앞 우물에서 길어 날랐다. 물 값은 돈으로도 받고 생선으로도 받았다. 배에서는 조기 외에도 홍어, 민어, 도미 등의 잡어를 말려 놨다가 물과 바꿔 먹기도 했다. 파시 때면 주민들도 간통에 조기를 절이고 '갱변'에 굴비를 말리는 일을 하며 소득을 올렸다. 주민들은 대부분 글이나 숫자를 몰라 임금을 받을 때면 돌멩이를 쌓아가며 셈을 했다. 조기 임자에게 돈을 받아 돌멩이 숫자대로 나눠 가졌다. 파시 때면 아이들도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다. 용돈벌이에 조기를 이용했다. 외상으로 빵을 사서 배를 돌아다니며 선원들에게 팔았다. 선원들은 조기를 주고 빵을 사 줬다. 그것으로 용돈벌이가 충분했다.

   
▲ 옛일을 추억하는 연평도 노인들.

# 당구장, 빵집, 야바위꾼까지 몰려들던 파시

일제시대에도 파시 때면 백조환과 녹두환 등 두 척의 연락선이 인천과 해주에서 연평도까지 매일 운항할 정도로 연평도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파시 때 연평어업조합 하루 출납고가 한국은행(조선은행)의 출납고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연평도는 돈이 넘치는 황금의 땅이었다. 조기가 그대로 현금이었다.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황금바다 연평 바다로 돈 실러가세" 하는 민요는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노래였다.

파시가 서면 수많은 상점이 새로 생겼지만 색시 집과 함께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린 곳은 선구점이었다. 연평도의 선구점은 외지인뿐만 아니라 김동문, 박홍표씨 등 이재에 일찍 안목이 트인 연평사람들도 경영했다. 선구점에서는 어구는 물론 쌀과 장작 등 선상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품을 팔았다. 사람들이 넘치는 파시 때는 모든 장사꾼이 바가지를 씌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짧은 순간에 한몫을 잡아야 했으니 정상적인 상도덕이나 질서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법이야 완전 무법이야, 무법 천지." 파시 때면 쌀을 사러 가도 제대로 무게를 달아 주지 않았다. 주인이 담아 주는 것이 한 가마고 한 말이었다. 무게를 달아 보자고 하면 "그럼 딴 데 가서 사"라며 배짱을 부렸다. 물건이 부족하니 속는 줄 알면서도 안 살 수가 없었다.

해상이나 지상이나 파시의 주인은 어부들이 아니었다. 장사꾼들이었다. 파시 때면 잡화점, 약국, 목욕탕, 이발소, 당구장, 옷가게, 고무신 가게, 빵집, 과일 가게 등 없는 것 없이 다 생겼다. 강변 자갈밭에는 엿장수와 호떡장수, 야바위꾼도 몰려들어 판을 벌였다. 연평도 땅이 온통 널어 말리는 조기 천지였으니 아이들은 조기를 슬쩍 주워다 엿이나 호떡으로 바꿔 먹기도 했다. 큰 조기 두 마리를 가져가야 호떡 한 개를 줄 정도로 조기 값이 쌌다.

파시 때면 '뺑뺑이'라 부르는 야바위가 성행했다. 뺑뺑이는 번호 매긴 표적을 세우고 총으로 맞추면 건 돈의 두 배를 가져가는 도박이었다. 노점에서는 붕어빵이나 찐빵도 팔았다. 주민들도 엿이나 묵, 두부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연평도 주민 강순환씨가 하는 냉면집도 인기가 좋았다. 시장통에는 떡집, 국수집도 즐비했다.

해방 전까지는 연평도에도 일본 사람들이 여러 집 살았다. 배를 만드는 삼나무(스기목) 수입상을 하던 '하마다'라는 일인은 황해도 전역에 대한 삼나무 공급 허가권을 갖고 있었다. 그의 집은 '갱변' 쪽의 2층 목조주택이었는데 선주들은 그의 집 앞에서 어선을 지었다. 파시가 서면 하마다는 선구점도 크게 열었다. 일본에서 물품을 직접 가져다 팔았다. '이케다'는 파시 때 목욕탕을 했다. 장작불로 물을 끓여 목욕물을 댔다. 그는 연평도에 처음으로 포도원을 열고 포도를 재배하기도 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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