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1]하인천 어시장

부둣가 좌판·대형상회… 비린내 나는 북새통

경인일보

발행일 2009-05-20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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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부두 전경.
사진제공/인천시 동구청

# 경인지역 최대 어시장 하인천 포구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연평도에서 개성, 평양, 해주 등 이북 지방으로의 교역은 차단됐다. 동시에 서울의 마포나루를 출발해 한강의 물길을 따라 연평도로 이어지던 뱃길도 끊기고 말았다. 그때부터 인천은 연평어장의 조기들이 뭍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됐다. 당시 인천의 포구는 화수, 만석, 화평 부두 등 여러 곳이었지만 그중에서 중심은 하인천 포구였다. 인천 어시장이 경인지역 수산물의 최대 공급처가 된 것이다.

   
조기철이면 하인천 부두는 조기잡이 어선과 상고선 등이 드나들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안강망 배들은 사리 때 조업을 하고 조기가 들지 않는 조금 때는 직접 조기를 싣고 하인천으로 들어왔다. 부두로 들어오는 모든 어패류는 '강제 상장제'에 따라 수협 위판장의 경매를 거쳐야 거래가 가능했다. 수협 위판장은 지금의 하인천역 철길 건너편에 있었다. 하인천 위판장은 경기도 지부 수협이 관리했고 화수동 위판장은 인천시 수협이 관리했다.

하인천 부두 주변에는 어시장의 좌판들과 수 십 개의 대형 상회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경인상회, 부흥상회, 용유상회, 미자상회, 종호상회, 대남상회, 오씨상회 등은 조기를 비롯한 어류와 굴, 조개 등의 패류를 취급했다. 상회의 주요 고객은 서울과 인천, 경기 지방의 상인들이었다. 서울의 노량진 시장이나 인천의 여러 시장 상인들도 하인천에서 수산물을 사다가 팔았다. 하인천은 오랜 세월 인천의 중심 어시장이었다.

   

# 1890년 인천 최초의 어물객주 생겨

하인천 어시장의 역사는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개항 전 인천은 한적한 포구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어나면서 인천에 최초로 어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1887년 남양에서 강화까지 인천 근해의 어로권을 획득했다. 15척의 어선으로 조업을 시작한 일본인들은 인천에서의 수산물 판매권도 얻었다. 1895년부터는 조업하는 일본 어선수가 30여척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조선의 어선들도 인천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천 최초의 어물 객주는 1890년, 한양의 청파동에 살다 인천으로 내려온 정흥택씨 형제였다. 정씨 형제는 어선들이 드나드는 신포동 부둣가에 어물전을 짓고 수산물 도매시장을 설립했다. 정흥택씨의 막내 동생 정세택과 장남 정태영이 어물전을 운영했다. 둘째 동생 정순택은 경인선 기차에 선어물을 실어 서울의 시장으로 보내는 중개상을 했다. 어물전의 주요 고객은 일본인 주부들과 조선인 음식점 주인들이었다. 조선인들 대부분은 생선 지게장수에게 한꺼번에 많은 양의 생선을 사서 염장하거나 말린 뒤 보관해 두고 먹었기 때문에 어물전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필요할 때마다 어물전으로 나와서 생선을 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어시장도 생겼다. 1898년 5월, 이나다 가츠히코란 일인이 '조선인 어업자 양성'을 명목으로 청나라 거류지에 어시장을 개설했다.

1900년 초부터 인천 해안에 매립공사가 시작되자 신포동의 도매시장은 북성동 하인천부둣가로 옮겨갔다. 하지만 하인천으로 옮긴 도매시장은 1907년 일본인들이 세운 인천 수산주식회사에 흡수되고 말았다. 1930년대부터는 일본인들이 인천지역 어시장의 상권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932년, 임겸 상점은 15t 규모의 어업용 제빙 공장을 설립해 어선들에게 얼음을 공급했다. 채미전(청과물 시장)에서 어물전인 인화상회를 경영하던 양인수씨의 아들 양성혁은 30년대 후반부터 조기를 일본에 대량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뒤에도 오랜 세월 흥성하던 하인천 부두는 1975년 항동의 연안부두로 어시장이 옮겨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인천 골목마다 조기 말리는 모습 장관

하인천의 상회 주인들은 생조기만이 아니라 굴비로 말려서 팔기도 했다. 상회주인들은 인부들을 사서 큰 시멘트 간통에 염간 한 뒤 지금의 대우기계 마당 자리에다 열 마리씩 두릅으로 엮어서 말렸다. 당시에는 상인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조기를 대량으로 사다가 말려놓고 일 년 반찬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이들은 과일 서리하듯 조기 서리를 하기도 했다. '인천 개항장 풍경'에서 인천 출신의 김윤식 시인은 당시의 추억담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1960년 중반까지는 아무 길바닥에나 조기를 말리는 풍경이 흔했다. 특히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중구 대부분 동네 골목길은 조기를 말리느라고 펴놓은 가마니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여기저기 발길에 채일 정도였는데 웬만한 집조차도 보통 500 마리 쯤은 사서 널었다. 잿빛을 띤 은색 광택이 있고 배 쪽은 붉거나 황금색인데 수 백 마리가 시뻘건 알집을 밑으로 삐죽이 내밀고 누워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학생이었던 우리들은 가끔 내동이나 송학동쪽 골목길에서 조기 서리를 했다. 이렇게 서리한 반쯤 마른 굴비는 학교 뒤 숲에 들어가서 원시인처럼 그냥 날로 찢어 입에 넣기도 했고, 어느 때는 친구네 셋방 연탄 화덕에 올려 인근에까지 참으로 화려한 냄새를 풍겨주기도 했다. 전기밥통이 없던 시절이니 밥은 당연히 찬밥이고 거기에 먹다 남은 굴비 토막을 뒤적여 대가리와 가시까지 쪽쪽 빨아 먹는 맛!"

조기는 어떤 방식으로 요리해도 풍미가 넘쳤다. 생물은 굽거나 탕으로 먹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조기를 염간 해서 사나흘 꾸득꾸득 말려 먹거나 오랫동안 바짝 말려 굴비를 만들어 먹는 것을 즐겼다. 바짝 마른 굴비는 항아리에 넣어두고 반찬을 했다. 굴비는 쪄 먹기도 했다. 찜통에 찌는 것이 아니라 냄비에 물을 자박자박 붓고 끓이면 짭짤하고 뽀얀 국물이 우러나왔다. 그 맛 또한 기가 막혔다. 그래서 인천 출신의 신태범 박사 같은 이는 "산뜻한 단맛을 풍기는 조깃국은 일품이고, 굴비가 없이는 여름 살림을 못하는 줄 알았던 시절이 오랫동안 있어 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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