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2]연평도 조기시대의 종말

파시철 하루도 안거르고 사건·사고… 해주경찰 임시파견…

정진오 기자

발행일 2009-05-27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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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들이 공연을 하고 개도 돈다발을 물고

   
일제 때 연평도에는 상주하는 경찰이 없었지만 조기 파시 때면 해주에서 경찰들이 임시로 파견 나왔다. 일본인 소장이 순사 3~4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순사들만으로 인원이 부족해 파시기간 동안 임시직원을 썼다. 그들을 '대리 순사'라 했다. 순찰은 대체로 완장과 목검을 찬 대리 순사들의 몫이었다. 하루도 사고가 없는 날이 없었다. 섬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큰 사고가 나면 해주로 무전을 쳤다. 경찰선이 바로 달려와 범인들을 싣고 갔다. 파시가 끝나면 순사들은 철수하고 다시 연평도는 구장(區長)을 비롯한 섬의 원로들과 주민들이 동규(洞規)에 의해 자치적으로 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그것을 '동네방'이라 했다.

   
파시 때면 카바레도 생기고 가설 신파극장이나 곡마단도 들어왔다. 더러 연예인들이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파출소 앞 공터에 가설극장이 생기고 백남봉, 양훈, 양석천 같은 코미디언이나 장소팔, 고춘자 같은 만담가들이 공연을 했다.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도 와서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난 다음날 가설극장 터에 나가면 돈다발을 줍는 일도 흔했다. 선주나 선원들이 술에 취해 구경을 나왔다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파시 때는 개도 돈다발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파시에 사람과 돈이 몰리니 간혹 폭력배들이 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연평도에서 쫓겨났다. 일제시대 어느 해던가 해주 시멘트회사의 오야붕이라는 폭력배가 부하들을 이끌고 연평도를 '접수'하러 왔다. 해주 깡패가 왔다기에 선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갔다. 오야붕이란 자는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바르고 긴 앞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돌려서 붙였는데 무엇으로 붙였는지 바람이 불어도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야붕은 지팡이 손잡이에 쇳덩이를 덧댄 '등산마찌'를 무기 삼아 들고 왔다. 하지만 연평도에 모인 선원들이 모두가 힘깨나 쓴다는 거친 뱃사람들이었다. 선원들이 깡패들을 에워싸고 "야야, 너 해주에서나 깡패 노릇하지 연평 와서 깡패 노릇 하려고 하냐"고 엄포를 놓은 뒤 멱살을 틀어쥐니 바로 항복하고 이내 줄행랑을 쳤다.

# 눈물의 연평도

   
아침이면 갈 가마 아궁이에서 잠든 선원을 볼 수도 있었다. 밤에 술 취한 선원이 자기 배를 찾아가지 못하고 온기가 남아 있는 갈 가마 아궁이에서 자버렸던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리는 파시 때는 작은 섬에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중에서도 화장실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공중화장실이 있었지만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벽이면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둑한 해변에 작은 불빛들이 길게 늘어서서 깜빡거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해변에 앉아 함께 대변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불빛이었다.

연평도에서도 1930년대 큰 폭풍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34년 연평도에 큰 폭풍이 몰아쳤다. 6월 1일 아침부터 비가 오고 풍랑이 일자 어선들이 내항으로 피항해 들어왔다. 내항에 들어온 어선은 600여 척. 6월 2일 오후 4시경, 강력한 폭풍이 몰아쳤다. 600여 척의 어선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충돌해 323척이 파손되고 204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후일 황해도 지사와 황해도 수산협회에서 조난자 위령비를 세웠다.

사라호 태풍 때도 수많은 조기배들이 뒤집혔다. '눈물의 연평도'를 만든 태풍 사라는 1959년 9월 15일, 사이판 섬 해역에서 발생해 한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동해로 빠져나가 소멸했다. 사망·실종 849명, 이재민이 무려 37만3천459명이나 됐다. 선박은 1만1천704척이나 파손됐으며 재산피해는 1천900억원에 달했다.

# 어로저지선과 파시의 종말

연평도 근해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어장은 구월이 안골을 비롯한 해주 인근 바다였다. 해방 후에도 3·8선 이남인 대수압도 북쪽 해주만까지 남한의 조업구역이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휴전이 되면서부터 황금어장의 대부분이 북쪽의 영해가 됐다. 남쪽의 어선들은 연평도 북쪽 1.3㎞ 거리인 NLL 이남에서만 조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조기를 쫓는 배들은 황금어장을 눈앞에 두고 조기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월선 조업을 단속하는 남북 양측의 감시가 있었지만 감시를 피해 미력리도 등 북쪽 섬들 앞까지 숱하게 넘어다녔다.

그 과정에서 밤에 몰래 북쪽 바다로 넘어가 조업하던 남한 배들이 북한의 포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했다. 1955년 5월에는 북한군이 월선 조업 중이던 남한 어선들에게 집중 포격을 하여 수십 명이 사망했다. 그 후에도 남한쪽 배들의 월선 조업은 중단되지 않았고 남북간에 잦은 마찰이 빚어졌다. 그러던 중 남한 정부는 1968년, 연평도 북쪽으로 어선들의 항해를 금지하는 어로저지선(어로한계선)을 만들었다. 어로저지선이 생기면서 어선들은 월선 조업을 할 수 없게 됐다.

어로저지선이 그어지던 무렵은 오랜 세월 남획의 결과, 칠산어장과 연평어장으로 회유하는 조기떼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던 시점이었다. 회귀하는 조기떼의 소멸과 황금어장인 연평 북쪽 바다의 조업제한으로 연평어장은 순식간에 쇠퇴했다. 그에 따라 연평도에 있던 서해 어로지도 본부도 덕적도 북리 항으로 옮겨갔다. 1969년까지도 더러 올라오던 조기떼는 1970년경부터는 아주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조기 파시가 막을 내리고 마침내 연평도의 황금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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