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5]'쟁기주며' 바다밭을 갈던 덕적도 어민들

최고 일당 받던 배목수, 자가용 부리던 선주들 '노는 물'이 틀렸다

정진오 기자

발행일 2009-06-17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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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적도 도우 선착장의 민어 어부상.

   
# 일제의 식민지되면서 덕적도 어선도 나가세기 배로

일제시대 초기 덕적도에서도 전래의 어선인 봉선(蓬船)이 사라지고 일본식 어선인 나가세기 배가 등장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 어민들이 만들어 사용하던 안강망 어선을 덕적도에서는 일중선(日中船), 혹은 나가세기 배, 안강망 배라 했다. 덕적도에서 처음으로 나가세기 배를 도입한 사람은 북리의 문태순이었다. 덕적도 사람들도 초기에는 나가사키에 직접 가서 배를 지어 오기도 했지만 차츰 일본인 도목수 밑에 들어가 목수 일을 배워 온 조선 목수들에 의해 나가세기 배가 보급됐다. 1930년대에는 대부분의 덕적도 어선들이 나가세기 배로 바뀌었다. 풍선(風船)이었던 덕적도의 나가세기 배들은 한국전쟁 이후 차츰 기계배로 바뀌어 갔다. 김춘광, 송재순, 장경업, 최봉도 등이 덕적도의 기계화 1세대 선주들이었다.

나가세기 배의 선체에는 여러 칸의 선실이 있었다. 코칸은 배의 맨 앞머리에 있는 창고다. 선미에는 뒷마칸이 있었다. 그물 등속의 어구를 넣는 창고다. 뒷마칸 앞쪽에는 방장이 있었다. 선원들이 숙소로 쓰는 방이었는데 서드리칸이라고도 했다. 어획한 조기는 중간의 사이다칸에 적재했다. 사이다칸이란 이름은 처음 나가사키에서 들어온 일본 어선들이 이 칸에 사이다를 넣고 온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연평도처럼 덕적도에서도 그물을 바다에 설치하는 것을 '쟁기준다' 했고, 조업에 필요한 선구를 총칭해 '트쟁기'라 했다. 어업 또한 먹거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농사일의 연장으로 본 것이다. 농민들이 논밭을 갈 때 어민들은 바다를 쟁기질하며 삶을 이어갔다.

오랜 세월 북리에서 배 목수와 선주를 지냈던 강명선(68)씨를 만났다. 예부터 '집 목수는 배를 못 짓지만 배 목수는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다. 배 목수의 기술이 그만큼 고급이라는 뜻이다. 강씨는 20대 후반부터 선주가 되어 한때는 안강망 어선 4척으로 조기와 민어, 갈치 등을 잡았지만 하나씩 팔아먹다가 망했다. 강씨는 11살까지 황해도 옹진군 봉구면 평양리 육도에서 살았다. 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충청도 원산도까지 피란갔다가 덕적도로 와서 정착한 피란민이다. 덕적도 북리에 정착한 강씨는 19세 때부터 배 목수 일을 시작했다. 6·25 직후 북리에는 2곳의 조선소가 있었다. 그 중 한 곳을 강씨의 고모부가 운영했다. 고모부는 일제 때 조선소와 기계공장이었던 해주 신선 중공업의 소장을 지낸 최귀현씨였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최씨는 피란지인 북리에서 강씨의 고모와 재혼을 했다. 최씨는 일본인 배 목수들보다도 배 짓는 기술이 월등히 뛰어났다. 강씨는 그런 고모부의 수제자가 되어 배 짓는 일을 배웠다. 목재는 일본에서 삼나무(스기나무)를 수입해 썼다. 강씨는 "삼나무가 배의 재료로는 최고의 목재였다"고 회고한다. 쉽게 썩지 않고 질기고 견고하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벼워서 부력이 뛰어났다. 쌀 한 가마니가 2만원할 때 배 목수는 하루 일당 3천원씩을 받았다. 나가세기 배 한 척을 짓는 데는 목수 8~9명이 보통 한 달 반에서 두 달쯤 일했다.

   
▲ 1930년대 건립된 덕적면 어업조합 건물.

# 어선 진수식 날은 기생 불러다 잔치까지

배가 완성되고 진수식을 하는 날이면 인천에서 기생까지 불러다 잔치를 열었다. 선주가 배 목수들을 위해 크게 한턱 내는 것이 관례였다. 진수식 날은 온갖 화려한 깃발로 배를 치장했다. 고깃기(선주기), 서낭기, 장군기, 오색기, 상(上)기 등을 매달았다. 강씨는 배 목수일로 돈을 벌어 선주가 됐다. 그는 선주가 된 후에도 배 짓는 일을 병행했다. 하지만 뱃일로 버는 돈은 다시 배에 들어갔다. 배의 숫자를 늘리고 t수를 늘리고 어구를 장만하느라 번 돈을 다 투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족의 씨가 마르면서 어획고가 급감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배를 한 척씩 팔아먹었지만 끝내는 아주 망하고 말았다. 그런 선주가 한둘이 아니었다.

선주는 선원뿐만 아니라 선원 가족들에게도 절대적인 존재였다. 선주는 배임자, 선주 부인은 뱃집 아줌마라 불렀다. 선주가 선원들을 부리는 것처럼 선주 부인은 선원 가족들을 부렸다. 아버지 말은 안 들어도 선주 말은 듣는다 했다. 북리에서는 이씨네(이재규 이기섭), 소씨네(소창모), 박씨네(박순복) 등이 가장 큰 선주 집안이었다. 큰 선주들은 다들 인천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선박의 주소지는 덕적도였지만 생선을 판매하는 곳은 인천 화수동 부두였다. 연평도 선주들은 하인천 부두로 갔지만 덕적도 북리 선주들은 화수동 부두로 갔다. 북리 선주들은 1950년대에 벌써 자가용을 두고 부릴 정도로 자산가였다. 북리에만 안강망 배가 100척이 넘었다.

덕적도의 선주와 선원들도 어획물을 짓 나누기로 분배했다. 일제 때부터 한국전쟁 전까지는 선원의 임금이 대체로 월급제였지만 한국전쟁 후에는 어획량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배분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중선 배는 3 대 7제였다. 배임자가 7할, 선원들이 3할. 그 3할을 선원 8명이 다시 짓 나누기로 분배했다. 소선은 보통 5 대 5제였다. 선원들은 경력에 따라 수익이 달랐다. 초짜들은 한짓재비(외지재비)라 해서 몫이 가장 적었고 1년 이상 경험자는 짓반재비, 선장은 두짓재비였으며 경험 많은 선원은 특별대우했다. 선상 생활은 군대보다 규율이 더 엄격했다. 작은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고 한 사람의 실수로 많은 사람의 목숨이 좌우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뱃놈은 아이, 아저씨가 없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 1960년대 후반 덕적도 북리항 풍경(작자 미상).

# 덕적도, 타리도와 함께 대표적 민어파시의 고장

예부터 이름난 민어 어장은 신안의 태이도(타리도)와 재원도, 인천의 덕적도, 평안도 신도 바다였다. 신안에서는 타리 파시나 재원도 파시가 흥성했다면 인천에서는 덕적면의 굴업도와 북리가 민어파시로 이름 높았다. 여름철 덕적도 근해는 민어의 산란장이었다. 정문기 박사는 '어류 박물지'에서 "전라도는 태이도가, 경기도에서는 덕적도가 예부터 유명한 민어 산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수산협회 소속의 상고선들이 한국 민어어장의 민어들을 냉장해서 일본으로 실어 갔다. 상인들은 조업하는 어선들을 따라 이동하며 흑산도, 법성포, 위도, 연평도 등에 조기파시를 열었다. 조기파시가 끝나면 이들 중 일부는 타리 민어파시를 찾아갔고 또 일부는 굴업도나 덕적도 북리로 흘러들어 민어파시를 형성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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