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7]1936년 8월 '민어의 어기로 덕적도 대혼잡'

6월말부터 북리 민어파시… 1930년대 최고전성기…

강제윤 기자

발행일 2009-07-08 제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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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리항 매립지. 꽃게잡이 그물 사이로 똥바위가 보인다.
# "인천 근해의 어장 중 '넘버원' 덕적도"

   
덕적군도는 일제 초부터 굴업도 민어어장과 울도 새우어장의 발견으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굴업도가 덕적군도의 어업 전진기지였다. 하지만 1923년 대해일로 굴업도에 피항 중이던 100여 척의 어선이 파선되고 많은 인명피해가 나자 일제는 어업전진기지를 덕적도 북리로 옮기게 했다. 1925년경부터 북리항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중선(中船) 배들로 북적거렸다. 연평도 조기잡이가 끝나는 6월말부터 8월 초순까지 북리 어장과 굴업도, 각흘도 어장 등에서 민어잡이가 이어졌고 북리에는 민어파시가 섰다.

1935년 8월11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성어기에 덕적도로 데뷔하는 수호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경찰과 우편, 무전, 의료진 등이 8월 10일 일제히 덕적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들이 덕적도에 진입한 것은 인천 근해의 어장중 '넘버원'인 덕적도 수천 종업원의 편리를 도모코자 였다. 북리 민어파시에 몰려든 수천 명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이 들어가고 임시 우체국이 서고 의료진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1936년 8월 8일 '조선중앙일보'도 '민어의 어기로 덕적도 대혼잡'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 북리 민어파시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각처로부터 덕적도를 바라고 몰려드는 어상, 선원, 색주가 등이 수천 명에 달하므로 인천서에서는 임시주재소를 설치했다." 북리 민어파시는 193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

해방 후에도 한동안 덕적도의 어업은 번창했으나 한국전쟁과 함께 일시 쇠퇴했다. 하지만 휴전 후 배를 가지고 나온 피란민들이 덕적도에 눌러 살면서 덕적도 어업의 성장을 주도했다. 파시 때만은 못했으나 휴전과 함께 연평, 덕적 어장의 조업이 재개되자 북리 항에도 수백 척의 외지 어선들이 다시 찾아 들었다. 1968년 연평도에 어로제한선이 설치되고 연평도에 있던 서해 어로지도본부가 덕적도 북리로 이전해 왔다. 조업 허가와 안전조업에 대한 지도를 받아야 했던 어선들은 북리로 몰렸다. 이 때 잠깐 북리는 파시같은 성황을 누렸다. 선창가에는 옹진수협에서 '깡'을 열고 임시 위판을 했다. 인천에서 온 상회 주인들이 물건을 사갔다. 선구점도 덩달아 바빠졌다. 막걸리 집도 문을 열고 드럼통에 소주를 넣어두고 파는 집도 생겼다. 하지만 일제시대 열렸던 파시가 부활된 것은 아니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상인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북리 사람들이 장사를 했다.

# 수백t급 일본 무역선이 민어를 실어가다

1960년대 북리에는 노천극장까지 있었다. 북리에는 조선소와 철공소도 2곳씩 있었다. 작은 쑥개 초입의 철공소 건물 하나는 지금도 남아서 어구 보관 창고로 쓰이고 있다. 폐교가 된 명신국민학교 아랫녘이 배터(조선소)였다. 지금의 해경파출소 자리에는 어업 지도소가 있었고 뒷산에는 무선국도 있었다.

민어철에는 북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 선원들까지 몰려드니 무엇보다 부족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그래서 다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바닷가로 나가 볼일을 봤다. 눈만 감으면 거기가 화장실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똥을 누던 바위를 똥바위라 했다. 그래서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런 북리를 쑥개가 아니라 똥개라고 놀리기도 했다. 지금 해안은 매립되었고 똥바위는 일부만 남아 있다. 북리에서는 민어나 조기를 능동 자갈밭이나 땔감 나무 위에 널어서 말렸다. 여름 민어철에 사용할 얼음 창고도 있었다. 겨울에 논에서 얼음을 잘라다 땅을 파고 움막을 지어 보관 했다. 어한기인 겨울 동안 동네 사람들은 얼음 자르기로 일당벌이를 했다.

일제 때부터 민어는 일본의 상선이 얼음에 재워 일본으로 싣고 갔는데 1960~1970년대 덕적도의 민어도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됐다. 일본 무역선은 선미도 앞에 떠 있다가 민어를 수집해 사갔다. 민어는 계량 단위가 '층'이었다. 가마니에 넣어서 무게를 달았는데 한 층이 100근(60㎏). 큰 것은 두 마리면 한 층이 넘었으니 민어 한 마리가 어린애만큼이나 컸다는 이야기다. 많이 잡힐 때는 중선(中船) 배 한 척이 한번 출어에 70~80층, 무려 4~5t을 잡았다. 덕적도 민어 중 일부는 인천의 상고선들이 실어갔다. 인천 평남 상회의 상고선이 특히 북리의 민어를 많이 사갔다. 바람이 불어 배가 못 뜨면 어민들은 민어를 염장해서 말린 뒤 팔았다. 낚시로 잡던 굴업도와 달리 덕적도에서는 민어를 유자망과 비슷한 민어 투망으로 잡았다. 투망배가 걸그물을 던지면 민어들은 그물코에 꽂혔다.

   
▲ 덕적도 민어파시를 보도한 1936년 8월 8일자 조선중앙일보 기사.

# 민어의 씨가 마르자 북리도 몰락의 길로

덕적군도의 대표적인 민어 어장은 굴업도의 굴업골, 백아도의 뺄골, 선미도의 사사골(새새골) 등이었다. 가장 큰 민어는 사사골에서 잡혔다. 사사골 어장 민어는 마리 수는 적은데 크기가 커서 '발치기'라 했다. 굴업골은 중간 크기가 잡혔고 뺄골은 씨알이 가장 작아서 '통방맹이'라 했다. 잡히는 숫자는 뺄골이 많았다. 장봉도 쪽에서는 사람만큼이나 큰 민어가 잡혔다. 큰 민어일수록 얕은 물로 다녔다. 그래서 장봉도와 교동도 사이 어장인 큰골 민어 잡이를 최고로 쳤다. 큰골은 얕은 바다지만 물살이 엄청 거셌다. 그러나 대량으로 잡아들인 민어는 결국 "일본 무역선만 배를 불렸다." 수백t급 일본 무역선이 민어를 무더기로 실어갔지만 많이 잡힐수록 가격은 떨어졌다. 민어잡이도 오래 가지 못했다. 덕적도 민어도 연평도 조기의 뒤를 따랐다. 그 크고 많던 민어들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삼천포, 통영, 여수 등지에서 온 유자망(투망) 배들이 그물로 씨를 말려 버렸어. 산란기고 뭐고 없이. 그렇게 몇 년 긁으니까 씨가 마르더라고."

대형 선단들이 싹쓸이 조업을 한 결과였다. 조기와 민어가 자취를 감추자 전국에서 몰려들던 어선들의 발길도 끊겼다. 1970년대 들어서는 덕적도 어선들도 동지나해로 진출했다. 근해 어장이 고갈되자 먼 바다로 어족을 찾아 나선 것이다. 뱃길이 멀어지면서 어선의 규모가 커졌다. 한번 출어하면 1천상자씩 잡아왔다. 어선이 커지고 속력이 빨라지자 중간 기항지로서 북리항의 기능이 사라져 갔다. 동지나해 조업에서 돌아온 덕적도 배들도 화수동 어판장으로 직항했다. 덕적도 어장이 고갈되자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 북리 선주들 대부분이 인천으로 이주해 갔다. 선원 가족들도 선주와 함께 떠났다. 북리는 일시에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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